2009. 1. 11. 23:25

[] 로드무비 - part. 02. 090107

# 08 - 경주, 계림, 오후 4시 50분 경



첨성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계림이 있었다. 신라의 김씨 성 시조인 김알지를 금계가 내려두고 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숲이다. 생각해보면, 계림은 신라의 초기 국호이기도 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이 곳을 신성시 했다는 증거일까?

어렸을 적, 나는 신화에 푹 빠져 살았다. 단군 신화에서 삼국유사, 그리스 로마 신화, 수메르 신화, 북유럽 신화, 힌두 신화, 이집트 신화 등등에 젖어 살았었지. 그런 나에게 경주는 신화가 그대로 숨쉬는 무대인 거다. 그래서 더욱 흥미가 있었던 거고. 그래서 그런지 계림을 거닐면서 과연 내가 금계였다면 김알지를 어디에 내려놨을까 하는 상상으로 숲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오래된 숲이라 그런지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마음대로 가지며 뿌리를 뻗은 나무들. 그런 나무로 가득찬 숲에서 전화를 받으려니 왠지 숲의 주인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전화를 받으며 마음 속으로 '죄송합니다'를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고. 여길 보고 나니 한편으로 박혁거세의 왕후가 된 알영 우물이 궁금해졌다. 역시나 닭이 내려두고 간 사람. (사실을 고백하자면 김알지 부인이 알영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_-; 숙소에서 다시 찾아보니 박혁거세 부인이더군.) 경주 지도를 보니 역시나 '알영정'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곳은 오릉 근처라서 좀 더 가야해서 다음날로 미루고 안 가긴 했지만. (그러나 이틀 째 일정을 바다에 한 눈에 반한 나머지 숙소를 바닷가로 옮기는 바람에 경주 시내 여행은 첫 날로 끝이었다. -_-;;)

# 09 - 경주, 내물왕릉, 오후 5시 경



계림은 트여있는 숲이다. 그래서 아까 보였던 고분들과 바로 이웃하고 있다. 계림 끝자락에는 내물왕릉이 있었다. 뭔가 고분이 있었는데 상석이 멋들어지게 놓여 있어서 가보니 내물왕릉이라는 비석이 있었다. 옆에 있는 대리석 위에서는 아마도 신하들이 줄줄이 허리를 굽히고 서있었을까? 세상을 떠난 왕을 기리며.



내물왕릉에서 발길을 돌려 자전거를 세워둔 계림 입구로 가며 문득 위를 보니, 해가 채 서산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성미급한 반달이 하늘에 나왔다가 나무 끝에 걸려 꼼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까지 하얗게 질린 채 나무에 걸려있는 반달. 괜찮아. 나무가 금방 보내줄꺼야.

# 10 - 경주, 석빙고, 오후 5시 반 경




중간에 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오는 통에 발길이 느려졌다. 잡아먹힌 시간을 애도하며, 자전거에 다시 올라탔다. 계림에서 나와 바로 오른쪽으로 돌면 석빙고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이건 신라 시대 유적은 아니고, 조선 시대에 다시 지은 거라고 한다. 꼼꼼히 아치형으로 쌓아올린 석빙고 내부. 입구는 창살로 막혀 있었는데, 어찌나 낮은지. 그 당시 사람들은 키가 그 정도였으려나. 나와서 보니 환기구가 있었다. 안쪽을 들여다 볼 때는 뚫린 곳이 없었는데, 얼마나 교묘하게 만든 것일까. 왠지 감탄이 나왔다.

# 11 - 경주, 반월성, 오후 5시 40분 경


분명 표지판에는 반월성, 석빙고 이 쪽 이렇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거 뭐 성같은게 보여야 말이지. 알고 보니 석빙고가 있던 터가 모조리 반월성 터였다. ㅎㅎㅎㅎㅎ 왠 주춧돌이 이렇게 많아, 여긴 무슨 건물이 있었던 거야, 하고 있었는데 월성이었어. ㅠㅠ 이 월성이 바로 석탈해가 숯을 묻어서 호공한테서 빼앗아간 그 집이라고 한다. 터가 어찌나 좋은지, 호공 이 안목좋은 양반, 혼자서 이렇게 중얼중얼 거렸다. 이런 좋은 터에 지은 좋은 집을 그 꾀에 반해 넘겨주다니. 당신은 진정 대인배! (하긴 그랬으니 석탈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호공을 꽤 높은 벼슬자리에 임명했겠지. 그 포부와 생각의 됨됨이와 마음 씀씀이를 보고) 꾀쟁이 석탈해와 대인배 호공을 생각하며 흐뭇흐뭇해하며 다음 표지판을 따라 내려오니 이미 어둑해진 길 건너편에 바로 안압지가 있었다. (거기가 거기다. 거리가 정말 가깝다,  서로. ㅎㅎㅎ)

# 12 - 경주, 안압지 (임해전지), 오후 6시 경

아아.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안압지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안압지를 처음으로 인상깊게 접한 건 언젠가 M본부에서 명절 특집으로 해주었던 '한국의 조경'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였다. 그때 어찌나 아름답던지,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 켠에 있었다. 아아. 이번에 가서는 발길이, 눈길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원래는 신라의 동궁 내에 있는 궁정 연못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곳에 오면 국정으로 얼키고 설켰던 머릿 속이 화-하게 정리되었을 것만 같다. 누군가의 눈을 피해 연인의 허벅다리를 흐드러지게 베고 누워 사랑 타령을 풀어놔도 좋을 곳이고, 스스럼없이 속내를 털어 놓을 친구들과 허심탄회하게 자리를 깔고 어딘가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논해도 좋을 곳이다.







특히나 내 눈을 잡아끄는 게 있었으니, 그건 역시 한국 전통 건축의 은근한 선의 아름다움이다. 완전히 깎아 지르듯 반듯이 내려온 것도 아니고, 아주 티가 나게 각이 비스듬하게 진 것도 아니고, 마치 치마의 고운 주름처럼 은근은근하게 살짝 비스듬히 내려오는 모서리들이 어찌나 예쁜지.


저 약간 비스듬한 저 선! 저게 바로 매력이다. ㅠㅠ 그리고 또 나의 마음을 잡아끈 것. 그것은 바로 처마.


사실 안압지에 들어선 건물들은 현대에 들어서 재건한 거긴 하지만, 역시 이 처마는 정말 예술이다. 마치 기러기가 금방이라도 날기 위해 날개를 화악 펼친 듯한 이 처마. 금방이라도 저 어두운 밤하늘로 푸드덕하고 날아갈 것 같은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날아라, 내 마음아.

한국 전통 정원이 다 그렇지만, 입수구와 퇴수구가 늘 독특하다. 안압지에서도 가장 독특한 구조물이 입수구와 퇴수구이고. 그런데 입수구는 조명까지 설치해서 튀게 해놨는데, 퇴수구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_-;; 이거 복원을 해 놓은거야, 안 해놓은거야. 게다가 입수구를 통해 물이 자연스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연못 여기저기에 설치된 인공전기펌프를 통해서 물이 채워지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고즈넉한 그 분위기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그 소음이, 천 년 전에 이미 가능했던 치수 기술이 이제는 재현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소쇄원에 가서도 아쉬운 게 항상 그거였는데. 물길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 대나무로 멋지게 만들어 놓은 물길에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아, 연못도 예전의 그 흥취를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더러워져 가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발길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점심도 거르고 자버린지라 배도 고프고, 날씨도 점점 추워져 와서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까 길을 비잉 돌아오다 본 천마총 뒤 중국집에서 밥을 먹기로 하고 자전거를 타고 천마총으로 향했다. 썰렁한 가게 분위기와 달리 볶음밥은 무척 맛있었다.

# 13 - 깊은 밤, 숙소 내 방

다음 날 아침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가야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세 시간 남짓 쉬지 않고 걷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느라 약간 지쳐 있어서 일찍 잠들었다. 아마도 10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잠들었을 게다. 그러다가 옆 방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서 가뜩이나 잠귀가 밝은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참고 잘랬는데 도무지 못 참겠어서 옆 방에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고 다시 자러왔다. 그런데 한 번 잠이 깨니까 잠이 안 오더라. 원래도 자다 깨면 다시 잠을 못 드는데, 잠자리마저 선 곳이니 안 올만하지. 그래서 한참 뒤척이다, 책을 읽다, 자려고 눈을 감았다가 결국 전화기를 집어들어 리스군한테 전화를 했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옆 방 사람들이 떠들어서 말하고 어쩌고 하고나서 내가 외톨이라 친구가 없어서 혼자 여행온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면서 왈칵 울음이 나와버렸다.

그래, 나는 옆 방 사람들을 시샘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혼자서 훌훌 여행을 떠날 준비가 사실은 안되어 있었던 거다. 굉장히 친해 보이는 세 명이 함께 여행을 와서 깊은 밤에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샘냈던 거다. 떠날 때는 나 혼자 굉장히 홀가분하게 떠나왔는데, 계속 경주 시내를 다니면서 들은 얘기가 '여자 혼자 무슨 여행을 오고 그래요, 위험하게.' 혹은 '같이 여행 올 사람이 없었어요?' 혹은 '혼자는 다니지 말아요.' 등등 어딘가 부정적인 뉘앙스의 이런 얘기들만 주구장창 듣고 다녔다. 그저 같은 말이라도 '조심해서 여행다녀요.' 였으면 좋았을텐데, 저런 말들이 어느 새 내 마음 속에 파고 들었나 보다. 사실 저런 말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릴 수 있는 말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건 내 맘 어딘가에 '혼자'라는 사실로 괜시리 자격지심처럼 마음에 살짝 금을 내 두었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말이지. 내가 울고 싶어서 운 것도 아닌데 전화에다 대구 찌질이라 뭐라 그러고. -_- 가뜩이나 기운빠져 있었는데 말 좀 이쁘게 해줬으면 어디 덧났니. 흥. 어쨌든 전화를 끊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마음이 평화로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단지 떠다니던 찌꺼기들이 그저 잠시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걸러내기 전에는 언제든 물이 휘저어지면 다시 부옇게 물을 흐려 버리는 그런 찌꺼기들이 생각지도 못 한 계기로 다시 출렁여 물이 흐려져버린 것 뿐이고.

계속 시끄럽던 옆 방도 이윽고 이야기소리가 잦아들고, 들리는 건 멀리서 동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 뿐이였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고, 밤은 깊어만 갔다. 챙겨간 책을 조용히 읽으며 뒤척였다. 어느 새 책 한 권을 내리 다 읽어 새벽이 깊어져 있었다.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은 다섯 시. 지금 시간은 어느 새 세 시. 이러다간 내일 해 구경도 못 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감았다. 경주에서의 첫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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