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6. 14:55

[펌] 나혜석 콤플렉스

예전에 뿔님께서 여성게시판토론게시판에 올려주셨던 시.
가슴에 와닿아 콱 박히는 말들, 말들,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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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콤플렉스


                                   김승희

 친구여, 나에겐 그런 두려움이 있다네,                   
                                                        
  저녁을 잘 먹고                                           
  실내악이 흐르는 유리창 앞에 고양이처럼 앉아
  어둠이 글썽글썽
  창문을 두드리는 시간이 오면
  어디선가 아직 잠들지 못한 바람이 있어 
  풍선처럼 고요히
  내 몸을 내가 찌르는 
  하얀 바늘의 살육의 느낌 같은 것,                       
  풍선 속의 바람은           
  고요히 스르르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간단히 숨을 거두고
  부네 탈과 미얄 탈 같은 것들이
  벽 위에서 휴지처럼
  구겨져 떨어지는 가벼운 시간

  친구여, 세상엔 그런 여인들이 있었다고 하지,        
  가면을 벗어 조용히 응접실 탁자 위
  가족사진 옆에 포개어 놓고                            
  나의 시간도 아니고
  너의 시간도 아닌
  '가정의 날'이라는 영원한 반공인(半空日) 같은
  어정쩡한 주부의 직업을 닫고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
  추운 겨울날
  다리를 건너간 여인들이 있었다고 하지

  여인에겐 원래 횡단공포증 같은 것이 있어서 
  다리를 건널 땐 어지럽고 무서워
  아버지나 남편의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인데
  그러나 추운 겨울날,
  홀로 다리를 건너간 여인들이 있었지,
  부네 와 미얄 탈이 걸려진 
  실내악의 방을 나와
  다리를 건너
  저 멀리 피안으로 홀로 가는 여인들은 보여주지,
  사자와 고양이는 똑같이 고양이과에 속한
  맹금류의 동족인 것을,
  여인들은 머리칼 위에 빛나는 야성의 
  화관을 쓰고 
  조용히 슬픈 선각의 사자후를 남겼네,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 고

  그리고 나혜석은 거리에서 죽었어,
  행려병자가 되어 쓰러지면서
  그녀는 원시림같은, 처녀림같은,
  산소용접으로 튀는 파란 불꽃같은 
  쓰러지는 두 눈은 어둠 속에서 정녕
  아름다웠지,
  여자는 삼계(三界)에 집이 없어
  아버지의 집도 
  남편의 집도
  아들의 집도
  여자의 집은 아니어서

  친구여, 나에겐 그런 예감이 있다네,
  나혜석은 죽어서도 옳게 묻히지 못하여               
  구천을 떠돌다가
  이제 나에게로 와서                                   
  내 가슴을 위패 삼아 머물고 있으니
  여자는 
  왜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하여 
  자신을 통 채로 찢어발기지 않으면 안 되는가,
  검정나비처럼 흰나비처럼
  여자는 왜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하여선
  항상 비명횡사를 생각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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