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26. 12:26

[라흐쉬나의 색안경 갈바쓰고] <2> 볼륨업 권하는 사회 (1)

이번 준비호도 나왔다.
이 글을 새벽까지 쓰고, 기분이 너무도 참담하여 날을 꼬박 새고 출근을 했었다.
쓸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쓰고나서 곱씹는 기분이... 참 그랬다...

http://colorwomen.tistory.com

이 주소가 진보신당 여성정치위원회(준)에서 펴내는 소식지 준비호 블로그입니다.
많이들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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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쉬나의 색안경 갈바쓰고]
<2> 볼륨업 권하는 사회 (1)


무려 한 달 만에 뵙게 되었군요! 이번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3월 14~15일 이틀 동안 있었던 진보신당 여성당원 워크샵이 훌륭히 마무리된 것을 두 팔 들어 열렬히 축하합니다. 와아~ \(>∇<)/ 그 동안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던 중앙당 당직자 분들을 비롯하여, 바쁜 시간을 쪼개어 전국 방방곡곡과 바다 건너에서 참여해주신 여성 당원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챔피언이십니다. 잇힝~ (네, 죄송합니다. 멋진 여성 당원 여러분을 버리고 감히 중간에 먼저 혼자 사라진 죄를 이렇게라도 면피하고 싶었습니다. 흑흑. T-T 그치만 사탕발림이 아닌 진심이어요!!!) 2회 여성 워크샵 때는 꼬옥 스케줄 텅텅 비우고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두어 시간 정도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 두 시간 남짓도 제게는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이었거든요. 여성 당원 분들의 다르고도 같은 열정과 매력을 실컷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어찌된 게 제가 지금까지 만나 뵌 진보신당 여성 분들은 어떻게 한 분도 안 빼놓고 이렇게 멋질 수 있단 말입니까!!!!! 저 완전 행복합니다. 히죽 ^---------------^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멋진 분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길 바랄 뿐입니다.


언젠가부터 노브라로 밖에 나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원체 답답하고 옥죄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밖에서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벗어 던지는 게 브래지어였지만, 이제는 심지어 제 인생에서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기 시작했네요. 생각해보면 또래들보다 몸이 늦게 자란 덕에 브래지어도 늦게 하게 되어서 남들보다 덜 길들여졌기 때문에 더 쉽게 벗어 던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 가슴이 작은 편이라 벗어 던지기가 더 쉬웠던 것 같아요. 킥킥. 어쨌든 브래지어를 안 하게 된 이후로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어째서 브래지어를 기어코 불태워야만 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요즘입니다.


그러고 보니 6학년 때인지, 중학교 입학 할 때인지, 그 즈음에 심각하게 고민을 한 적이 있네요. 거웃이 자란 다음에 생리를 시작하는지, 아니면 생리를 시작한 후에 거웃이 자라는지 말이죠. 그때 뭐, 저한테 털은 날 끄떡도 않고, (남도 쪽 분들만 제대로 알아먹으실 거 같은데, 도무지 이 말을 쓰지 않고는 맛이 나지 않네요. 나름 저도 남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지라. 흐흐.) 생리를 시작할 조짐도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당최 알 수가 있어야죠. 나름 그 당시에 어딘가에서 읽었던 거웃의 쓰임새 중 ‘생리 시 냄새를 막아준다’라는 글귀를 억지로 가져다가 끼워 맞추며, 그래 생리 냄새를 막는 게 역할이라면 시작하기 전에 털이 나는 게 맞을 거야 라면서 혼자 끙끙대며 골머리를 썩히다가, 결국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저보다 먼저 생리를 시작한 친구에게 묻고 말았습니다. “야, 털 나고 생리해 아니면 생리하고 나서 털 나?” 라구요. 친구가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때 그 친구와 어느 새 19년지기가 되었네요. 작년 이맘때쯤에 친구는 혼인도 했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도 하고 낯부끄러운 기억입니다. 그렇지만 엄마와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갈 때마다 마주치던 동네 동생들은 아랫도리에 거뭇거뭇한 털이 이미 날 대로 다 나있는데, 오히려 나이가 많은 저는 맹숭맹숭하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랬겠어요. 안 그런가요? 요즘은 학교에서 다 가르쳐주나?


아니, 저도 꽤 어린 나이인 일곱 살 즈음부터 엄마한테 성교육을 받기 시작하긴 했는데, 하필이면 그걸 말씀을 안 해주셨거든요. 다른 건 아주 사실에 가깝게 가르쳐 주셔 놓고 말이죠. 어떻게…냐고요? 으음…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자 고추 있지? 그걸 너 잠지에 집어넣으면 아기가 생겨. 그러니까 누가 같이 가자고 해도 선뜻 따라가지 말고 조심해야 돼. 특히 계단 아래쪽같이 으슥한 데 말야.” 라구요. 네, 어떠한 머뭇거림도,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전부터 집에서 백과사전을 가져다 놓고 그림을 보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시긴 했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죠. 그 얘기가 뜬금없이 나온 건 아닌 게, 그 무렵 아동 성폭력 사건이 꽤 많이 일어났습니다. 외가에 갔다가 엄마랑 서울에 놀러 가는 길에 – 아마도 덕수궁에 놀러 가던 길이었던 것 같네요. – 지하철 승강장에서 전철을 기다리다가 저 얘기를 해주셨거든요. 승강장 옆 쪽 계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면서요. 말과 제스처가 엄마의 걱정 어린 마음과 강력하게 결합해서 강렬한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어쨌든 저렇게 사실대로 들어버리고 나니 별 호기심이 안 생기더라구요. O_O;;; 섹스에 대한 환상도 없었고. 환상을 갖기보다는 그냥 ‘당연한 어떤 것’이라고 여겼어요. 아무래도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에 눈을 떠버린 걸까요. 흐음.


여튼 다시 돌아가서 얘기를 하자면 저는 브라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전 글에서 썼던 빅토리아 시크릿 속옷이 아무리 아름답고 기능적이고 관능적이고 유혹적이고 매력적이라고 해도 브라를 하기 싫은 건 싫은 겁니다. 브라를 처음 하기 시작하던 때, 가슴 띠와 어깨 끈을 등쪽에서 고정하는 고리에 자꾸만 살이 스쳐서 상처가 나고 딱지가 앉아서 브라를 할 때마다 쓰라리고 아프던 기억도 있고, 브라 컵 사이에 있던 리본에 가슴팍이 긁혀서 상처가 나기도 해서 브래지어 차는 걸 엄청나게 싫어했지요. 제대로 안 차서 그런 이유도 있긴 한데, 명치 근처에 뭔가가 얹혀있는 그 느낌 자체가 싫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가장 좋아하던 계절이 언제였는지 아세요? 바로 겨울입니다. 왜냐구요? 뻔하죠, 뭐. 동복은 두꺼워서 티가 안 나니까 옷 속에 브라를 안 입어도 됐거든요. 하하하하. 저는 여중을 다녔는데요, 하복이나 춘추복 입는 계절이 되면 여선생님들 과목 시간에 런닝 셔츠를 제대로 입었는지 검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_-;;; 런닝 셔츠 안 입고 브라만 한 애들은 엄청 혼났지요. 하복, 춘추복은 얇은 하얀색 천으로 되어 있어서 속이 비쳤거든요. 아니, 그럼 안 비치게 교복을 만들면 해결될 것을 왜 그랬는지, 원. 하여간 브라도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야 하기 시작했는데, 그나마도 적응이 안 되더라구요. 집에만 오면 벗어 던졌습니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서는 브라에 든 와이어가 너무 불편해서 싫었어요. 다행히 아빠랑 남동생이 그런 거에 민망해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아, 굳이 브라를 입고 안 입는 것에 대해 의식할 필요가 없는 집안 분위기라서 무척 편했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죠. 생각해보니 워낙 저희 가족들이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지라 다들 집에 오면 편하디 편한 차림으로 있는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네요.


브래지어, 하면 떠오르는 첫 기억은 국민학교 때 입니다. 저야 또래들보다 조금 늦되었으니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서도, 뭐,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닙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의 남자 아이들은 짓궂음으로 똘똘똘똘 뭉쳐 있죠. 그리고 여자 아이들은 그 시기 남자아이들의 짓궂음에 비례하여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그야말로 처.절.히. 맛보게 됩니다. 지금 아이들은 저희 때보다 빨리 2차 성징을 맞이하는 것 같은데, 제 또래 여자아이들은 빠르다 해도 초등학교 4학년에 맞이하곤 했거든요. 대부분 여자 아이들은 보통 5~6학년 때 2차 성징을 거치기 시작하구요. 아시다시피 대개 2차 성징은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보다 빨리 겪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4학년쯤 되면 성장이 빠른 여자 아이들의 몸을 보면서 여자와 남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안타깝게도 자기들과 확연히 다른 몸으로 변해 가는 여자 아이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로 이어지기 보다는 그 여자 아이들을 향한 남자 아이들의 끊임없는 장난으로 이어집니다. (사실, 저는 그걸 장난이라기보다 폭력이라 부르고 싶습니다만.) 어찌됐든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이런 끔찍한 일을 지속적으로 겪으며 깨닫게 되는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은 여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당당하기 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는 ‘거추장스러운 어떤 것’일 뿐이라고 인식하기 마련입니다. 생리 시작했다고 딸에게 백 번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파티를 열어 준 들, 이미 일상에서 불편함을 넘어 불쾌함을 겪어 온 여자 아이들에게 그게 기쁜 일이나 되겠습니까, 어디.


남자아이들의 그 끔찍한 장난의 대상이 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브래지어입니다. 대개 여느 또래 여자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브라를 차기 시작한 여자 아이들이 표적이 되곤 했습니다. 뭐, 말할 것도 없죠. 복도를 지나갈 때, 교실에서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아이들이랑 놀 때,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 모여 있을 때 할 것 없이 브래지어 끈을 주욱 당겨서 늘였다가 탁! 하고 놓는 장난에 쉴 새 없이 당합니다. 그것뿐 인가요. 안 그래도 가슴에 몽우리가 지면 면으로 된 속옷에 살짝살짝 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갈라질 것처럼 아픈데, 남자 아이들이 일부러 여자 아이들 가슴 어림에 어깨를 툭툭 부딪히거나 손으로 치고 지나가곤 합니다. 이런 일을 겪는 게 하루 한 두 번이 아니고,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 하아. 기억을 더듬다 보니 너무 화가 나서 자체 검열해버렸네요. 아아. 어렸을 때 이런 장난에 안 당해본 여성분들 거의 없을 겁니다. 오죽하면 말이죠, 또래 아이들보다 먼저 가슴이 부풀기 시작한 여자 아이들 중에는 그런 장난에 시달리는 게 싫어서 늘 구부정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부푸는 가슴을 최대한 숨기며 걸어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단지 또래 아이들보다 몸의 변화가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당당하게 걷지 조차 못하는 겁니다. 이러한 장난의 표적이 되어보지 못한 여성 분들이나 대부분의 남성분들은 아마 모르겠죠. 얼마나 아픈지. 그리고 내가 여자라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단지 여자 아이라서, 남자 아이들과 다른 생김을 가졌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성적인 장난과 폭력에 시달려야 하며, 그러한 폭력을 통해서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는 현실은…정말 끔찍합니다. …차라리 현실이 아닌 악몽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건 비단 저만 겪었던 특별한 상황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남녀공학 국민학교 혹은 초등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여성들이 거의 빠짐없이 겪었던 일입니다. 아무래도 요즘 아이들은 저 어렸을 때보다 똘똘하니 이런 상황에 더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음. 이건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일들인데 말이죠. 제가 가장 처음 겪은 성폭력의 기억은 여덟 살 무렵입니다. 남자 친척분이 누워서 배 위에 저를 올리고 놀아 주다가 아랫도리로 손을 넣어서 팬티 속으로 잠지를 더듬거렸지요. 그 다음 성폭력의 기억은 국민학교 4학년 때네요. 담임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과학 상자 반에 들어갔습니다. 과학 상자 조립 경진 대회에 대비해서 방과 후에 빈 교실에 모여서 여러 가지를 만들어 보는 일종의 특별 활동 반이었지요. 다 합쳐서 세 명인가 네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저 혼자 여자아이였습니다. 5학년이었는지, 6학년이었는지 잘 생각은 안 나는데, 그 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오빠한테서 하루가 멀다 하고 성적인 언사를 들어야 했습니다. 섹스를 ‘낑낑’이라고 표현하곤 했죠. 여자 거기 안에 계곡이 있다느니, 낑낑을 하면 계곡에 물이 흐른다느니 그런 적나라한 얘기를 매일매일 들어야만 했죠. 심지어 짧은 체육복 반바지를 입고 간 날은 저를 보더니, 저를 화장실로 끌고 가서 낑낑을 하고 싶다는 얘기마저 들어야 했습니다. 그때는 왜 그걸 묵묵히 듣고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 다음은 초등학교 5학년 때군요. 교실 가장자리 분단에서 교실 벽 쪽에 붙은 책상에 자리 배치를 받으면, 제 자리로 가기 위해서 짝꿍 의자 뒤를 지나가야 합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짝꿍 의자 등받이와 짝꿍 뒷자리 아이 책상을 손으로 집고 훌쩍 뛰어서 자리로 돌아가는데, 짝꿍인 남자 아이가 위로 손을 스윽 뻗쳐 제 가슴을 만지더군요. 네, 그 날은 정말 대판 싸웠습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어렸을 때 일은 대략 이 정도네요. 다른 여성분들도 저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겪었던 일들이 그다지 크게 다르시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라는 사실을 얼마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방법을 통해서 몸과 마음 깊숙이 각인시켜 왔는지 말이죠.


이런. 아직 오늘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 했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글이 길어지고 말았네요. 게다가 이번 글은 아동 성폭력에 관한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이전 글에서 약속 드린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야 제대로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앗, 그러고 보니 왠지 이 글 읽고 저를 위로하시는 분들이 생길 것 같은 쓸데없는 걱정이 드는데요. 글쎄요. 몇몇 분들 생각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바로 위 단락을 쓸 때 저는 그냥 무덤덤한 느낌으로 썼습니다. 분노에 치를 떨거나, 아픈 기억에 상심하거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언젠가 한 번쯤 나왔을 법한 피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인, 다소곳이 손수건을 손에 쥔 채 앉아 눈물을 떨구거나 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죠. 그저, 나도 참 이런 엄청난 폭력들을 어렸을 때부터 겪고도 지금까지 무사히 잘 버텨서 살아남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가 대견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충분히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시달리고도 남았을 법한 일들을 겪었는데도 말이죠. 음. 뭐, 겪은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되살아나는 걸 보면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것 같긴 하네요. 어찌됐든 저 기억들에 사로잡혀서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하지 않고 담담히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습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도 약속 드린 대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는 억압과 폭력과 강요와 학대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죠. 가뜩이나 감기 걸리기 쉬운 환절기에 황사까지 날려서 눈병마저 돌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들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 번에 뵈어요. =)


라흐쉬나
2009.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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