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26. 16:20

[라흐쉬나의 색안경 갈바쓰고] <1> 빅토리아 시크릿 2008

이번 주도 소식지가 올라왔다. 원문은 http://colorwomen.tistory.com/ 에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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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쉬나의 색안경 갈바쓰고] <1> 빅토리아 시크릿 2008

 

벌써 2주가 지나가고 마감이 다가왔군요. 마감이 끝나는 날은 늘 원고를 2~3회 분량 정도 미리 준비해 둬야지 라는 생각은 하지만 늘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고 맙니다. 모 통신사 광고 문구 마냥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제 일이야 제가 게으른 탓에 생각을 실천하지 못하는 탓이 크지만, 세상 일이 생각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이미 짜여진 세상 틀에 어쩔 수 없이 끼워 맞춰가며 살고 있기 때문이겠죠. 빡빡하고 힘든 일상에 제 글이 조금이나마 입가에 웃음을 가져다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주 이야기는 ‘빅토리아 시크릿 2008’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지난주에 출장을 갔다가 묵게 된 숙소에서 잠도 오질 않고, 할 일도 딱히 없어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니 모 케이블 방송에서 ‘ 빅토리아 시크릿 2008’을 방송해주더군요. 타이밍 좋게도 막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잠이 들지 못한 이유를 굳이 얘기하자면, 원래 잠자리가 낯설면 잘 잠들지 못하는 예민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묵었던 모텔의 방음 시설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습니다. 한참 혈기왕성한 나이에 양쪽 방에서 스테레오 서라운드로 들려오던 민망하고도 원초적인 음향 효과 때문이었죠. 여튼 덕분에 글 쓸 소재를 접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라고 봐야 하겠죠.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빅토리아 시크릿은 여성 속옷으로 유명한 브랜드입니다. 제가 이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된 건 초기 인터넷 매체로 유명했던 딴X일보의 칼럼 코너를 통해서였습니다.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순간이었죠. 여성들이 팬티나 런닝 셔츠 혹은 내복 이외의 속옷을 입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엄마가 같은 사이즈로 두 세 벌 정도 사다 주시는 하얀색 면 브래지어의 추억이 아마도 대부분 여성들의 속옷에 대한 첫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 더 발전하면 어깨끈이 탈부착되는 브래지어나 아예 끈이 안 달린 브래지어, 풀 컵, 하프 컵, 몰드, 레이스 등등을 찾아서 입게 되지요. 그렇다 해도 크게 기본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양을 보면 거기서 거기지요. 그런데 그 칼럼에서 소개하는 빅토리아 시크릿 브래지어 중 하나는 끈을 굳이 가슴 아래를 지나도록 하지 않고 허리에 감아서 고정할 수도 있게 만들었더군요. 보고 무척 신기했습니다. 뭐랄까요. 머 리 속에 있던 벽에 살짝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이외에도 다른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들어지게 모양을 만들어 내면서도 여성들이 편안할 수 있도록 하는 그 아이디어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거든요. 이런 게 바로 실용적인 거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로 빅토리아 시크릿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게 된 계기는 낸시 랭 때문이었습니다. 낸시 랭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정식으로 초청받지 못했음에도 비엔날레 기간에 베니스에 가서 야외 퍼포먼스를 펼쳤지요. 그래서 그의 데뷔가 베니스 비엔날레네 아니네 하는 논란도 일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입었던 의상이 바로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나온 빨간색 브라-팬티 세트였습니다. 그것만 입고 피에로 분장을 한 채로 바이올린 연주를 했었죠. 그 영상을 봤을 때 저는 여성 예술가가 속옷 바람으로 퍼포먼스를 하는 것에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가가 입었던 속옷에 더 눈길이 갔더랍니다. 색감과 속옷의 선이 너무나 고왔거든요. 참 예쁜 속옷이구나, 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빅토리아 시크릿이더군요. 
  


사실 빅토리아 시크릿하면 바로 떠오르 는 건 빅토리아 시크릿의 패션쇼입니다. 속옷 패션쇼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패션쇼가 여성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제 주위에서 빅토리아 시크릿 쇼를 싫어하는 여성분들을 본 적이 없네요. 이 쇼를 접한 대부분 여성들의 반응은 멋지다, 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의 모습은 속옷만 걸쳤음에도 무척이나 당당하고 시원시원하니까요. 


 


생각해보면 일상생활에서 여성의 속옷이라는 존재는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밖으로 비쳐 보여서는 안 되는 걸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2006년 무렵에야 목 뒤로 끈을 묶는 식으로 속옷의 일부를 보이도록 하는 게 보편화되었죠. 그 이전에는 어깨 끈이 옷 밖으로 보이거나 하면 칠칠맞다는 눈총의 대상이 되거나,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감추기 위해 애를 써야 했죠. 


 또한, 여성의 속옷이 외부로 노출되는 경우는 대부분 훔쳐보는 듯한 각도로 연출되기가 일쑤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치마 밖으로 살짝 팬티가 보인다거나, 셔츠를 풀어헤쳐 브래지어가 보이도록 하는 그런 사진이나 그림들이지요. 제가 보기에 그런 사진/그림들은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매체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드러내기보다는, 누군가가 숨어서 몰래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의식한 채로 매체에 담기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런 매체들은 대개 이성애자 남성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들이 볼 때는 썩 기분이 안 좋을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성적 욕망의 소구 대상으로서만 인식된다는 사실이 불편하 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터쇼의 레이싱 걸 사진을 볼 때마다 불편합니다. 그들은 늘 자신들을 이성애자 남성들의 성적 대상으로써의 여성으로 연출하고 있거든요. 


 


반면, 빅토리아 시크릿 쇼 같은 경우는 시원스러운 당당함이 있습니다. 늘 감추어야 했고, 남에게 드러내지 못했던 가장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것들을 활짝 열어 드러내버리는 거죠. 어딘가에 숨어 몰래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은밀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가장 공개적이고 가장 열린 공간에 끌어내어 누구나 똑바로 볼 수 있게 해버린 것입니다. 누군가의 불필요한 시선을 의식하거나 성적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여성이 아니라, 그저 그 모습 그대로의 여성이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대부분 여성에게 있어서 브라와 팬티는 일상용품입니다. 늘 몸에 걸치고 있어야 하는 내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인 것들이지요. 입어야 하는 것을 입을 뿐입니다. 누군가의 시선의 끝에 위치하기 위해 입는 것이 아니지요. – 간혹 섹스를 동반하는 데이트를 위해 신경 써서 속옷을 입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논외로 하도록 하죠. – 빅토리아 시크릿 쇼에는 그러한 천연덕스러움이 배어나옵니다. 여성이면 너무나 당연히 입는 것임에도 항상 감추어야 했던 것들을 풀어내고,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합니다. 어떠한 욕망이 서린 시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으로서 당연하고 당당하게 런웨이를 걷습니다. 물론, 속옷 자체의 디자인도 매우 훌륭하고, 속옷 이외에 패션쇼를 구성하는 여러 소품들에서도 재치가 넘쳐납니다. 모델들의 잘 다듬어진 몸매도 무척 멋지구요. 이렇게 특정 신체 비율을 가진 모델들이 여성들의 몸과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획일화시키는 부작용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리고 벗은 여성의 몸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강요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의 그들이 내뿜는 활기와 에너지는 무척이나 매력적입니다. 
  


일상에서 당연히 늘상 하고 있는 일임에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부분을 아주 일상적이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자체로 그 쇼를 보는 여성들에게도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는 거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 여성이 드러내고 싶어서 당당히 드러내는 것. 이것 때문에 여성들에게 빅토리아 시크릿 쇼가 인기를 얻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많은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는 이유는 사실 남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입고 싶기 때문에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지요. 


 

 


이왕 속옷 얘기를 꺼냈으니 다음 번에도 역시 속옷에 관한 얘기를 이어나가 볼까 합니다. 아마 위에서 글을 읽으시면서 불편하셨던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째서 여성이 브래지어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말하고 있냐구요. 그래서 다음 번엔 속옷을 입는다거나 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얼마나 여성의 몸이 지속적인 강요와 학대를 받고 있는지 한 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다음 주까지 모두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