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4. 23:31

[] 기분이 나아졌다.

아까 그 글을 쓰고 나서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상쾌한 청록색 밝은 색깔 운동복에 연한 녹색 얇은 웃옷을 챙겨입고, 카키색 운동화를 신고 기숙사 옆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폭신한 우레탄이 딸린 달림길을 따라 열 바퀴를 돌았다. 마라톤 동호회인 듯한 분들이 무서운 기세로 달림길로 달려다니시길래 푹신한 달림길에서 벗어나 딱딱한 인라인 길을 따라 돌았다. 다행히 마지막 한 바퀴는 그 분들이 정리 운동 하시느라 푹신한 달림길에서 달릴 수 있었지만.

지금 이 맘때 하늘은 날씨를 닮아 가을과 겨울이 섞여 있는 하늘이다. 백조 자리의 데네브와 직녀별, 견우별이 이루는 가을의 대삼각형이 머리 꼭대기를 조금 벗어나면 어느 새 동쪽 하늘엔 마차부 자리를 따라오는 쌍둥이 자리 등 겨울 별자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운 좋게도 직녀별 오른편 언저리를 지나가는 별똥별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별똥별이 어찌나 반갑던지.

몸을 풀기 위해 준비 운동을 이십여분 하고 가볍게 달림길을 한 바퀴 돌고나서는 줄곧 걷기만 했다. 얇은 옷을 입었어도, 뛰지 않고 걸어서 돌아도, 한 발 한 발 정성들여 걷다 보니 바람이 쌩하니 불지 않는 한은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열 바퀴를 걷겠노라 정해놓고 걷는 거지만, 그 열 바퀴를 재빨리 채우기 위해서 설렁설렁 걷지 않고 내 발이 온전히 땅을 딛는 그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충실하게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그저 대충 걸어 열 바퀴를 채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고 나간 게 아니라 내 몸이 움직이는 느낌을 최대한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고나 할까.

허리에 손을 얹고, 엄지 손가락은 등 근육에 닿게 하여 한 발 한 발 디뎌 나갔다. 내 발 아래 땅을 딛는 느낌을 마치 처음 느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이 땅에 닿고 다시 허공으로 들릴 때마다 따라서 움직거리는 근육을 느끼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아, 내 한 걸음을 위해 이렇게 내 몸이 정직하게 움직여주고 있구나라는 감탄이 새삼스럽게 터져 나왔다.

자근자근 4킬로미터 남짓 되는 열 바퀴를 모두 돌고 마무리 맨손체조를 했다. 그래도 여름 언저리에 운동했던 게 몸에 나름 배었는지 그 때보다 힘들지는 않다. 비뚤어진 왼쪽 골반도, 왼쪽 다리 근육도, 왼쪽 발목도 예전에 비해 당기는 정도가 덜하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몸이 대견해 웃음이 슬몃 났다. 기특한 자식들. 지들도 내 몸이라고 내 노력을 알아주는 구나 싶어서.

요즈음에 조금 조급해지긴 했었다. 인턴 자리가 있다고 해서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 회답이 오지 않고 있어서도 그랬고,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다고 한 곳에 말이 안 전해졌을까봐도 그랬고. 학과에서는 교과 석사들 학사 관리를 안하는지 전혀 공지 사항이 없어서 이러다 뒤통수 맞고 졸업 못할까하는 걱정도 있었고 말이지. 다른 교과 석사들도 별다른 사항은 들은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래저래 불안한 건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간밤에는 일주일 만에 졸업 논문을 써내라고 하는 꿈을 다 꾸었을까 싶다. 꿈이라지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뭐, 논문 석사들 드래프트 완성일이 다음주이니, 나도 슬슬 프로젝트 보고서 요약본이라도 정리해두어야 겠다. 내 프로젝트야 거의 끝난 거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게다가 쥐뿔도 없이 괜히 요즘 설치고 다니기만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지난 밤엔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마음이 불편하니 왼쪽 몸마저 아파와 계속 몸을 뒤틀어 댔었지. 심지어는 심마(心魔)가 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한새벽에 소리라도 냅다 질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내 힘으로 풀릴 문제는 굳이 걱정을 하지 않아도 풀리고, 내 힘으로도 풀리지 않을 문제는 걱정해봤자 소용없으니 앞으로도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거다. 내 힘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많아지도록 내 힘을 길러야겠지. 남들 도움도 좀 받아가면서 말이야. 하하.

마음이 약해지니 세상 온갖 것들이 나를 공격하는 것만 같은 생각에 너무나 힘들었었다. 걸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 혼자서 괜시리 허상으로 이루어진 적을 만들어서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세상은 불합리하고, 약자들에게 가차없고, 동성애자에겐 불편하고, 내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 더 많지만 그래도 바꿔보고 싶어서 이 길을 선택한 거고, 세상이 강제하는 규범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내가 선택한 일이니 거기에 맞지 않는다고 너무 힘들어할 필요 없을거란 생각도 들었다.

밤하늘에 뜬 별도 보고, 몸도 풀고, 머릿속 헝클어진 생각도 풀고 나니 여러모로 기분이 좋다. 뜨신 물에 몸도 씻고 신나는 노래만 골라 듣고 있으려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나만큼 고만고만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겠지만, 여튼 나에게 나는 나 하나뿐이니까 소중하게 여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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