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보고 싶었지만, 어둠의 경로로 보았습니다. =_=;; 혼자 가서 보기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누군가 같이 가서 보자니 조금 민망하기도 해서요. 결국 연구실 오라버니들이랑 같이 보게 되긴 했지만. -_-;
보신 분들은 괜찮겠지만, 혹여나 아직 안 보신 분들에겐 미리니름이 될 거 같아 리뷰 내용은 숨깁니다. 쓴 지는 좀 되었습니다. 올해 초에 썼으니까요. 저 영화 보고 어찌나 울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먹먹합니다.
2007, 이안 감독
두 인물 간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기가 막히게 잡아낸 작품.
영화에서 보여지는 섹스신은 수위는 높았지만 애초에 에로티시즘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었다. 성적 긴장감을 유발시키려는 목적이 아닌, 두 주인공이 서로 심리적 주도권을 갖고자 벌이는 싸움을 섹스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세 번의 섹스신을 통해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육체의 주도권은 양조위가 점하고 있었지만, 마음의 주도권은 이미 처음부터 탕웨이가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3년 만에 보는 거라 하더라도 그녀의 그토록 가벼운 도발에 그가 서슴없이 넘어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이미 자신이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려는 여성의 행동을 애써 힘으로 찍어 누르면서 자신의 욕망만을 강요하며 밀어붙여야만 했던 게 아닐까.여성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이 무너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거라고 보였다.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는데 이용할 도구로 스스로 믿고 싶어 한다고. 그녀를 마음에 품는 순간, 그에게로 날을 향할 칼과도 같은 약점이 될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세뇌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의 말미에서 그의 비서가 책상 위에 내려놓던 반지를 향해 “내 꺼 아냐!”라고 소리치던 그 모습과는 달리, 차마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고 그저 고여 있기만 한 눈으로 막부인이 쓰던 침대에 걸터앉아 쓰다듬던 그 모습에서 그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또 다른 키워드는 애국심, 이데올로기, 개인의 자아 실현, 두려움이었다. 모든 것이 부딪히며 혼란에 빠져들고, 희생을 강요하던 시대상에 따른 두려움. 애국심으로 포장한 비겁함과 두려움 (대학 동료들), 허세와 떠들썩함으로 감춘 두려움 (패전이 가까운 일본군들), 가학적인 섹스로 감춘 두려움 (이),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따를 비난에 대한 두려움 (광위민, 왕치아즈, 이).
연극부 동료들이 작당을 하고 왕치아즈에게 암묵적으로 섹스를 강요하던 그 장면 - 사실 그 행위를 섹스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일단 섹스라고 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꼭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단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성기 삽입과 사정만이 있을 뿐이다. - 에서 머리에 피가 거꾸로 치솟을 만큼 분노를 느꼈다. 연극의 가장자리에서 관객으로 존재하던 그들에게, 애국심으로 가장한 치기가 가득한 그들에게,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과 의견은 더 이상 존중해 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녀와 서로 호감을 가졌던 연극부의 리더가 그 역할을 했다면, 그나마 분노가 덜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위선 없이 그 순간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영화에 마음이 갔던 이유가 세간의 섹스신 논란이 아닌, 일제 치하에서 대학을 다니며 연기를 접하고, 열정을 경험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저런 상황들에 더 민감하게 마음을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청연’에서도 내가 읽어냈던 키워드는 자아실현과 시대의 충돌이었으니까.
대체 식민지이면서 전쟁 상황인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니는 인텔리 여성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었을까. 게다가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대학 공부조차 맘 편히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은 연극조차 배부른 소리라며 외면을 당하던 그 시대에,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으며, 어떤 꿈을 꿀 수 있었을까. 나였다면 철저히 절망뿐인 그 시대를 차마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을 거다. 몇몇 장면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영화에 몰입한 이유는 최근에 내가 힘들었기 때문에,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깊은 절망을 느껴왔기 때문에 그랬던 거였고.
그런 상황에서 사랑이라도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장 불쌍하면서도 비겁했던 인물이 바로 연극부의 리더다. 왕치아즈를 두둔했다가는 나라보다 여자가 중요하냐는 비난을 당장 들었을 테고, 그의 리더 위치마저 위태로웠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당당히 나서지도 못 했다. 애써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던 그 모습에 분노와 애처로움이 겹쳐지곤 했다. 동료들이 나란히 꿇어앉아 죽음을 기다릴 때, 그는 오히려 가장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옆에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당당히 앉아 있는 왕치아즈를 보면서 살짝 웃음을 머금던 그 모습이.
배우들 하나하나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촘촘하고도 부드러운 천을 짜듯 만들어진 영화였다. 어려운 역할임에도 완전히 몰입해서 영화 속 인물이 되어버린 탕웨이 덕분에 영화가 균형을 잡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지만 양조위를 지금까지의 배역 중 가장 악역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모자랐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내 눈에는 오히려 ‘2046’에서의 역할이 더욱 악역처럼 보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