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25. 00:39

[]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그 곳에서 그를 느끼다.

일때문에 6월부터 수원을 매주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화성 행궁 옆 화성사업소에 뻔질나게 들락거렸는데, 막상 행궁 이외에 화성 성곽이나 기타 시설물들은 거의 가보지 못했었다. 그나마 화성 행궁도 딱 한 번 들어가봤고 말이지.

어찌됐든 일은 확실히 맺어야 하니, 이번 주말로 날을 잡아서 화성을 쭈욱 돌아보았다. 상설 공연들도 보러 다니고.

화성은 정조가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론을 잠재우려 수도 천도를 결심해서 만들어 낸 계획도시이다. '수원화성의궤'라는 한자와 그림이 가득한 공문서도 빈틈없이 남겨둔 공으로 불타버린 수원 화성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그 덕에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로도 등록이 되었고 말이지.

1박 2일 동안 화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것은 정조의 대단함이 아니라, 정약용은 진짜 천재라는 거였다.

조선 시대 실학자이며 '목민심서'를 쓰고, '거중기'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정약용. 그가 바로 수원 화성의 설계자이다. 화성을 돌아다녀 보면 알겠지만...그는 정말 천재다. 곳곳에서 그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거중기를 발명한 것도 그렇지만, 수원 화성을 돌아다니고 있노라면, 그 엄청난 건축물을 혼자서 설계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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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행궁 내에 전시된 거중기>

고구려 이래로 성문에 거의 쓰이지 않던 옹성을 4대문에 차용한 것, 성벽에 다듬은 자연석 외에도 벽돌을 이용한 것, 총포와 쇠뇌, 활, 끓는 물이나 기름 등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은 것, 그 중에서도 백미는 북수문인 '화홍문'과 그 옆에 자리한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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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수문 - 화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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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에서 올려다본 동북각루(방화수류정-오른쪽)과 동북포루(왼쪽)>

정약용. 그는 병법에도 능통하면서 낭만주의자인 천재이다. 물이 흘러가는 곳에 지은 수문 위에 누각을 짓고, 성벽 밖을 감시하는 동북각루 밖에 '용연'이라는 연못을 만들어 경치 감상과 감시 임무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미적 요소까지 가미해서. 앉아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물소리가 들리는 그곳은 시조 한 수가 절로 나올 것 같은 곳이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뜯어도 좋고, 감시하는 부하들과 가벼운 다과와 담소를 나누어도 좋을 곳이다. 게다가 위치가 얼마나 절묘한지 수원천 근처로 다가오는 수상한 움직임을 모두 포착할 수 있을 정도다. 화성은 수원천을 남-북 중심에 두고 지어진 곳이라 수원천 상류에 독을 풀면 수성에 엄청난 어려움이 있을 지형이다. 그러나 성곽의 위치가 매우 절묘하게 수원천 상류 쪽을 모두 감시할 수 있을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그럴 걱정은 접어두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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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 위 누각에서 본 수원천 상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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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 위 누각에서 본 하류 방향. 바람과 물소리가 무척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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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본 경치 - 화홍문(왼쪽)과 성곽, 그리고 장안문>

팔달산 능선을 따라 지은 성곽은 어떤가. 서장대를 2층 누각으로 지었는데, 2층은 창호살로 누각 사방이 가려져 있어, 지휘관이 얼마든지 시야를 확보하면서도 적에게 공격받을 걱정 없이 팔달산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감시하고, 바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행궁을 지켜볼 수 있다. 게다가 산을 이용했기 때문에 돌로 쌓은 성곽의 높이에 비해 실제 성벽의 높이가 엄청나게 높아지는 효과를 가져온다.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살려서 지었기 때문에, 주요 거점들에서 내려다보면 성 바깥 모두를 관측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고층빌딩은 전무했고, 성 밖은 농지가 대부분이었을테니 눈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서남각루인 화양루에 올라서 보면 북-서-남이 훤히 보인다. 화서문에 올라서면 의왕 쪽에서 오는 길이 훤히 보인다. 연무대 쪽은 서울 쪽에서 오는 길이 훤히 보인다. 미심쩍은 움직임이 있을 경우에는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카메라가 아사해서 팔달산 쪽은 사진이 없다. ㅠㅠ)

정약용이 병법에 능통했다는 사실은 화성의 문 구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대문에 모두 옹성을 이용함으로써 공성과 수성 모두 용이한 구조이기도 하다. 옹성은 대문 바깥쪽을 원형(장안문, 팔달문)이나 반원형(화서문, 창룡문)으로 감싸고 있기 때문에 공성추를 이용하여 문을 부술 수도 없는 구조이다. 게다가 옹성 위로 병력 배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성에 침입하려 하는 적들을 둘러싸고 공격하기에 굉장히 유리하다. 국지적으로 다수 대 소수가 필연적으로 밖에 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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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깥쪽에서 바라본 화서문 옹성 - 화성열차 타고 찍어서 흔들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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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문 위쪽에 올라가서 찍은 옹성>

이런 구조는 화성에 존재하는 암문들에도 적용되어 있다. 밖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위치에 만든 것은 물론, 적이 용케 암문을 발견하여 열고 들어왔을 때도, 암문 내부는 입구 주위를 높게 둘러싸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궁수들을 문 주위에 둥글게 배치하여 좁은 문을 통해 한 줄로 들어오는 적을 하나씩 피격하기에 굉장히 좋은 구조이다. (동암문이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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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바깥쪽에서 찍은 북암문, 옛날엔 흙과 풀무더기로 감추어놨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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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찍은 동암문. 문 너머로 벽이 보이고, 문 양 옆에 계단이 있어 문을 전체적으로 둘러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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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찍은 동암문. 문이 말 한 필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다.>

수원 화성은 애초 규모보다 훨씬 넓게 지어졌다. 본래 거주하던 주민들이 성곽 안에 모두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조선시대였으므로 사대문 안에 거주할 수 있는 신분은 평민 이상만 해당되었을 거다. 그래도 백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마음씀씀이는 과연 정약용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그렇게 백성을 고려하여 성을 설계한 것은 내가 보기엔, 정조가 백성을 끔찍하게 생각했다기 보다는 정약용이 굳은 태도로 왕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게다가 정조에게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니 백성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 정조에게 이득이었기 때문에 쾌히 허락했을 것이고.

화성 성곽을 거닐고 있노라면, 정약용이 천주학에 빠져 들었을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과 이게 바로 진정한 실용주의로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렇게 마음쓸 줄 아는 사람이니 당연히 천주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라는 사상에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아름다움과 기능, 민생을 조화시켜 극대화시켜 실용주의를 현세에 이루어 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운치를 즐길 줄 알고, 병법에 능통하며, 글재주도 뛰어나고, 공학 부문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정약용. 그에 그치지 않고 마음씀마저 고왔으니...정약용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슬몃 들었다. 만약 그가 가까이 있었다면 정말 죽자사자 그만 쫓아다녔을 것이다. 그의 인품과 천재성에 흠뻑 빠져서.

그리 뛰어난 사람이 재주를 발휘할 기회를 더 갖지 못한 것을 보면,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큰가 새삼스레 알게 된다. 자신이 가진 권력과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를 그대로 깔아뭉개버리는 세상. 그 잘나고 역겨운 권위주의만 아니라면 그 옛날도, 지금도 이 세상은 훨씬 살기 나아졌을텐데.

화성을 돌아보며 아직도 곳곳에 스며 숨쉬고 있는 정약용의 숨결을 느끼며 한없이 행복하고, 기쁘고, 때론 전율이 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생각하며 슬프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입으로는 실용주의를 말하며, 손으로는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고위층들, 권위주의에 젖어 있는 기득권 세력들, 다른 사람을 향한 열린 마음씀을 쓸 줄 모르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삶에서 아름다움과 여유를 찾을 수도 없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 그 모든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머릿 속을 헝클어 놓았다.

수원 화성. 단지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다. 수원 화성을 통해 느껴지는 정약용의 철학과 마음씀, 전통과 그 당시 현대 문물을 결합하여 외관마저 아름답게 재창조를 해내는 그의 지적 능력, 그리고 조상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자연과 인간 삶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전통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느끼고 온 정약용의 천재성과 아름다움. 화성을 통해 표출된 그의 능력과 다른 이들의 삶을 소중히 느낀 마음씀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행했으면 하는 게 화성에 다녀온 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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