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4. 01:44

[] 소수자로서 바라본 진보신당의 온라인 공간

내일 관악 당협에서 있을 "명랑튼튼토론회" 패널로 섭외된 지라, 발제문으로 쓴 글이다. 힘들다,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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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서 바라본 진보신당의 온라인 공간

라흐쉬나

 

소수자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전에 먼저 소수자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이 정의는 내가 임의로 내린 정의가 아니라, 지금까지 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내려온 정의임을 먼저 밝힌다.

 

1945년에 루이스 워스는 소수자에 대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정의를 제시했는데, 그 정의는 소수자들이 그들의 신체적 혹은 문화적 특성 때문에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차별적이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그래서 스스로 집단적 차별의 대상으로서 간주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정의는 소수자로서 분류할 수 있는 기본 세 가지 주요 요소인 식별가능성, 차별적 대우, 집단성원으로서의 집단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정의가 더욱 구체화되면서 1999년 드워킨은 이 세 가지 요소 이외에 권력의 열세라는 요소를 하나 더 포함시켜 소수자를 정의하였다.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이어져 온 나라들과 달리 우리 나라는 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최근에야 비로소 시작하였다. 2000년에 들어 윤인진은 소수자를 소수자란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 성, 연령, 인종 및 민족, 종교, 사상, 경제력, 성적 취향, 지역, 또는 그 외의 이유로 지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준과 가치와 상이한 입장에 있어서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였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볼 때, 소수자의 개념은 한 사회에서 사회적 권력의 우세에 있는 다수자들의 신체적, 인종적, 성적, 민족적,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경제적, 지역적 특성과의 차이 때문에 차별의 대상이 되고,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소수자들은 권력의 열세에 놓여 있으며, 신체적/문화적 특성의 차이뿐만 아니라 다른 제 영역에서의 다수자의 특성과 구별된다는 것, 그러한 다름 때문에 차별의 대상이 되고, 당사자들이 그렇나 차별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소수자는 정치적/사회적 힘의 열세에서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 사상, 신체적 특성에서의 주변적 위치로 차별을 당하는 하위집단으로 이해되고 있다.[1]

 

 위에서 언급한 소수자의 정의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차별당하는 집단이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이미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굳이 나에게 넌 소수자야.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로, 누군가가 내게 손가락질 하며 계집년 주제에라고 말하지 않아도, 혹은 더러운 동성애자야라고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내 스스로가 사회에서 충분히 차별받고 있으며,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사회 속에서 은연 중에 행해지는 차별과 억압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지만, 소수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위험하다. 차라리 눈에 보이거나 직접 몸에 해를 가하는 폭력이라면, 그 시점에서 제지라도 하거나 반항이라도 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류의 폭력은 언제나 음험하게 주위에 도사리고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해치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면 기분이 나쁘거나, 마음의 상처로 남지만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종류의 폭력이므로 더욱 위험하다. 오직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만이 그 무서움과 위험을 알 수 있으므로.

 

 뜨거운 것에 데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화상을 입었던 자리는 다 나은 후라도 뜨거움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아주 조금만 뜨거운 것에 닿았을지라도 다치지 않은 부분에 비해 몇 배의 뜨거움과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소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소수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 비해 아주 작은 폭력에도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여성이라면 남성에 비해, 장애인이라면 비장애인에 비해, 성소수자라면 이성애자에 비해, 가난한 자라면 부유한 자에 비해, 젊은이라면 보다 나이 많은 이에 비해, 아주 작은 말이나 행동에도 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적어도 진보를 향한 사람들이라면, 두 가지 덕목만큼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나머지 하나는 어떤 형태로든 기득권을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다. 이 두 가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되려 엄격히 들이대야 할 잣대이다. 사회적 약자, 곧 소수자들을 위한 정책들과 의식이 필요한 진보 운동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위한 정책들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가진 아주 작은 기득권이라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은연 중에 내가 소수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어떻게 알아채고 고칠 수 있겠는가.

 

 앞장 서서 커다란 담론과 주의와 의의를 외치는 일은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담론을 생활로 끌어와 직접 그 담론에 따라 사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 생활 자체가 진보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사회를 진보적으로 만들겠는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의식을 바꾸려면, 구성원 중 하나인 자기 자신부터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최근 진보신당의 온라인 게시판에서 보이는 모습들은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진보신당에 모인 사람들은 사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 소수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글 첫 부분에서 밝혔듯이 소수자 중에서도 사회적 권력에 대해 우세한 사람들이 있고, 열세인 사람들이 있다. 소수자 속의 소수자가 바로 여성 당원들이며, 장애인 당원들이며, 성소수자 당원들이다. 권력의 열세에 해당하는 목록이 많아질 수록, 더욱더 열세에 위치하며, 그만큼 더 사회에서 고통을 많이 받게 되는 게 사실이다.

 

끊임없이 사회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이 찾는 정당이라면, 그리고 그 정당이 소수자를 위한 정당임을 표방한다면, 적어도 이들이 정당 안에서만큼은 불필요한 상처와 고통을 받지 않을 배려와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진보신당에서 그러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받을 고통과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뱉어낸 인간적 배려 없는 언사에 대해서도 이들은 어떠한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지금까지 진행된 사태를 보았을 때, 이들은 진보신당 내에서마저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다.

 

 나 역시 내가 이들이라 칭하는 소수자에 포함되기 때문에, 진보신당의 온라인 공간에서 엄청나게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더 이상 불필요한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 누군가의 입을 강제로 다물게 하던가, 아니면 싸워 이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정당이 실제로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이 없다고 보이는 것에 실망하고 더욱 상처를 받은 것이다.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라며, 장애인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지양한다는 정당이라며, 정작 이 정당과 당원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머물 공간을 소수자가 마음 편히 머무를 공간으로 마련하고, 유지했는가? 그 공간에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인간적 모멸감마저 느끼게 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한 의지와 정치적 입지, 그리고 능력은 과연 존재하는가?

 

 다른 분들의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듣고 싶고,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듣고 싶어서 진보신당의 온라인 공간을 찾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놓치던 이야기들, 당원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들, 주위 사람과 이야기할 수 없는 고민과 아픔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공유하기 위해 찾아간다. 혹은 내가 알지 못 한 나의 기득권과 권위 의식, 했어야만 하지만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았던 일들을 알기 위해 찾아간다. 내 입맛에 맞고, 내가 동의하는 글만을 읽기 위해서 그 곳을 찾는 것은 아니다.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과 내가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을 찾고 합의점을 찾아 함께 바뀌어가는 과정은 힘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다.

 

 글솜씨가 뛰어나든 뛰어나지 않든, 어려운 말과 생각을 장황하게 풀든 아니든, 따스한 말로 가득 찼든 날카롭고 정곡을 찌르는 말로 가득 찼든, 온라인 공간에는 그 어떤 글도 올라올 수 있다.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모두 평가하고, 점수를 매겨 걸러내는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 공간에 들르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간에 되도록 폭력에 노출되는 일을 막자는 것이다. 아무리 날 선 논쟁이라도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마음을 열어놓는 태도를 보여야 하며, 그냥 하는 얘기라도 누군가가 상처받을 만한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온라인 공간을 이용하는 기본 태도이다. 설령 상처받을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상처받은 상대방에게 솔직히 사과를 하는 것이 인간 관계에서의 기본적인 예의이다.

 

 생각해보라. 기본 가치에 버젓이 평화를 내세우는 정당 내에서 스스럼없이 폭력이 일어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한국 사회와 같이 구조적 폭력이 빈번하게 행해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폭력에 무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안에서 아주 작으나마 우세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상대적으로 열세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기가 쉽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폭력에 대해 눈 돌리고, 외면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보신당 구성원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것에 대해 생각하기 싫다면 진보신당 내에 그 사람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적어도 이 곳은 폭력을 지양하는 정당이니까.

 

 이번 토론회를 통해 폭력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고, 당 내의 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혹은 당 내에서 어떤 폭력에 놓여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폭력이라고 인식하는지, 그 폭력의 수위는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폭력이 벌어졌을 경우 폭력을 행한 자와 폭력의 대상자, 그리고 온라인 관리자와 온라인을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수습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 또한, 그렇게 폭력이라 합의된 일들에 대해서는 당원 모두가 심각성과 폭력의 내용들을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았으면 한다.



[1] 북한이탈주민의 사회적 배제 연구: 소수자의 관점에서 (류지웅, 2006)에서 소수자의 정의에 대한 부분을 발췌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