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11. 23:24

[] 로드무비 - part. 01. 090107

# Prologue - 어느 날 카이스트 한 구석에서

혼자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말하자면 졸업 여행이지. 졸업을 겸해서 혼자 훌쩍 떠나 이런저런 것들을 정리해 볼 시간도 갖고, 한편으로는 날 복잡하게 만들었던 곳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했고. 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카이스트 생활을 끝맺음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몇 주 전 진영 언니랑 통화한 뒤로 언니의 여행 권유에 더욱더 마음이 동했는지도 모른다. 뻔한 형편이지만 어디가 되었든 혼자 가고 싶었다. 외국은 솔직히 현실적으로 힘들고, 우리 나라에서 내가 가보지 않았고, 혼자 가볼만 한 곳. 후보지로 안면도, 보길도, 경주를 생각했는데, 경주로 결정했다. 사실 이 중에 경주만 안 가봤거든. -_-; 그냥 대충 경주가 어느 권역으로만 나뉘었는지만 보고, 일요일에 숙소를 정했다. 월요일에 바로 떠나고 싶었는데, 숙소가 월-화 안된대서 수목금으로 잡았지. 여행 떠나기 전날에도 저녁까지 와우했다. -_-;; 그래도 도서관에서 책도 빌리고 쭘형한테 카메라도 빌리고 여행 준비는 왠만큼 했지. 숙소 예약하고나서 여행갔다가 집에 가겠다고 엄마한테 전화하는데,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괜시리 눈물이 났다. 씩씩하려 했지만, 그 동안 많이 지쳐있었던 게 사실이었나보다.

# 01 - 카이스트 동측 기숙사 (세종관) 앞, 이른 8시

   


대전역에서 출발하는 아침 9시 30분 경주행 새마을호를 타기 위해 8시에 기숙사에서 나섰다. 해가 떠오르는 걸 보는 것도 간만이었다. 늘 밤새고 봤는데, 자고 일어나서 보는 건 말이지. ㅎㅎ;; 경주에서 자전거나 스쿠터타고 간편하게 다닐 생각에 옷을 덜 두툼하게 입었는데, 왠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려보니 이거 경주 가기도 전에 얼어죽겠더라. 게다가 둘째 날에는 토함산 올라 일출 볼 것도 계획해놨는데, 산 속에서 비명횡사하기는 싫었다. 얼어 죽느니 옷 갈아 입다 늦어도 택시타는 게 낫다는 생각에 기숙사에 다시 들어와서 든든히 오리털 파카를 위에 덧입고 택시 타고 대전역 갔다. (으아 택시비 7,600원 ㅠㅠ)

# 02 - 대전 - 경주 새마을호 열차, 김천 부근, 이른 10시

아침에 일찍 일어난 데다가 그 전날 밥을 거의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다. 사실 플랫폼에서 파는 크레페를 먹고 싶었는데,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려서 플랫폼 도착하니 9시 27분이라 사먹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기차에 그대로 올라탔지. 다행히 3호차는 까페 열차라 뭔가 팔더라. 책 한 권 들고 까페로 가서 마지막 한 개(!) 남은 도시락 하나를 사먹었다. 쌀밥과 물, 반찬으로 이루어졌는데, 전 세 가지 한 조각씩, 어묵볼 조림, 멸치볶음, 볶은 김치, 오징어 볶음, 연근 조림, 오이장아찌, 쇠고기 장조림, 귤 한 조각, 김이 반찬으로 딸려나오더라. 7천원이라 좀 비싸긴 한데, 기차 안에서 이 정도 먹는 것 치고는 맛이 괜찮아서 만족. 11시까지 까페칸에서 햇볕 쬐며 책을 읽다가 다시 자리로 가서 푹 잤다. 알람 맞춰두고.

# 03 - 대전 - 경주 새마을호 열차, 경주 부근, 경주역, 오후 12시 무렵

거의 온 것 같은 느낌에 눈이 살풋 떠졌다. 창 밖을 보니, 기찻길 옆에 고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 내가 경주에 왔구나, 여기가 과연 바로 경주로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즐거웠다. 어느 새 기차는 경주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내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 단위 여행객도 많았고, 아까 기차 안에서 얼핏 들은 바로는 이 날 경주에서 교사 연수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 온 것 같진 않은데, 짐을 많이 싸들고 오는 사람들이 꽤 내렸다. 선생님 같아 보였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고. ㅎㅎ

   


나를 태우고 온 기차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한 컷 찍어주었다. 덕분에 편하게 잘 왔어. =) 플랫폼에서 보는 경주역은 생각보다 멋들어지지 않았다. 작아도 왠지 신라의 미감이 확 느껴졌으면 좋았을 텐데, 저 멋대가리 없는 처마를 봐야한다니 실망이었다. -_-

경주역에서 나가 관광 안내소에서 지도를 하나 집어들고, 광장 왼쪽에 자리잡은 자전거 대여점으로 갔다. 스쿠터가 125cc밖에 없어서 내가 타고 다니기 좀 그렇더라. 사실 50cc 짜리도 안 타봐서 좀 불안했고. 그래서 2박 3일 동안 15,000원에 자전거를 빌렸다. (운전면허증 맡기고 빌렸다.) 자전거 대여점 아주머니께 숙소를 말씀드리니 천마총 근처라며 길을 설명해주시더라. 숙소에 전화해보니 그 근처 맞다고 그러고. 말투는 왠지 퉁명스러운 듯 하지만, 멀리서 혼자 여행온 내가 행여라도 길을 잃을까봐 친절히 길을 가르쳐주시더라. 자전거 여행용 지도에 손수 표시까지 해주시고, 건물들도 설명해주시면서.


아주머니께서 신신당부 하시며 말씀하신 '황남빵'. '경주빵' 말고 꼭 '황남빵' 앞에서 길을 건너 천마총 담벼락을 따라가야 한다고.

# 04 - 경주, 대릉원(천마총) 부근, 오후 1시 조금 전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천마총으로 향했다. 경주는 이정표가 무척 잘 되어 있어서 지도가 없이도 다니기 편하다. (내가 일했던 모 지역과는 천지차이지. 그 형편없던 도시 정보 시스템이라니.) 이른 아침에는 오리 연못 물이 꽁꽁 얼 정도로 정말 추웠는데, 경주는 남쪽이기도 하고, 낮이기도 하고 그래서 날씨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에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경주 시내 보도는 자전거 타기 편하게 빈틈없이, 평탄하게, 굴곡없이 깔려 있었다. 길 중간중간 약간 높은 턱이 있는 게 좀 아쉬웠지만, 지금까지 자전거 타고 다녀본 곳 - 광주, 대전, 경주 - 중에는 가장 나았다.


가는 길에 곳곳에서 보이는 고분들. 왠지 묘한 기분이 든다. 서울에서도 경복궁이나 덕수궁 돌담 옆을 걸을 때 간혹 드는 기분인데, 이 곳의 유적들은 그 당시보다 500년도 더 전의 것들이라 그런지 더욱 묘했다.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가 함께 섞여있다는 사실에.


# 05 - 경주, 숙소 사랑채 (게스트하우스), 오후 1시 경

천마총 앞에 도착해서 사람들한테 사랑채가 어디냐고 묻다가 한 아주머니께 위치를 들었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금방 보인다고. 역시 말씀대로 금방 보였다.


골목길을 접어돌아 철조망 담벼락 안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낡은 한옥집. 내가 묵은 '사랑채'라는 게스트하우스이다. 한 켠에 보이는 자전거가 이틀 동안 내 발이 되어준 그 자전거. 경주에서 어디에 묵을까 숙소를 찾아보다가 되도록 경주 시내에 거점을 정해놓고 돌아다니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을 했고, 숙박비가 싸야했고, 나 혼자라도 안심이 되어야 했다. (모텔에서 혼자 자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분위기가 어두침침하고 무거워서. 그리고 특히 한밤 중의 음향효과가...-_- 후우.)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마침 나와계셨다. 예약했던 사람이라고 이름을 대니 반가워 하시며 공동 주방, 내 방, 공동 샤워실과 화장실을 안내해주셨다. 방 천장에 보이는 서까래들. 왠지 정겨웠다.


방에 들어가서 가방에 바리바리 싸짊어지고 간 옷가지들을 좌탁에 얌전히 쌓아두고, 가방을 다시 간편하게 꾸렸다. 그리고 여행 동선을 잡기 위해 아까 관광 안내소에서 집어온 지도를 펼쳐들고 이불 안에 기어들어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_-;; 간밤에 여행간다는 생각에 잠을 세 시간 밖에 못 잤거든. ㅠㅠ 중간에 아빠 전화에 한 번 깼다가 몸이 너무 노곤해서 다시 잠들었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어졌나보다. 얼마나 잤을까. 뉘엿한 늦오후 햇살이 창호지 문을 주황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할 때 눈이 뜨였다. 시간을 보니 어느 덧 4시. 한솔오빠가 신신당부하던 '해질녘 첨성대'를 보기 위해 황급히 일어나 옷에 팔을 꿰었다. 조그만 가방에 사인펜, 지도, 지갑, 전화기, 카메라만 넣고 부리나케 자전거를 밟았다. 음. 그런데. -_-;;; 아까 숙소로 들어갔던 길로 나오면 바로 아래가 첨성대였는데, 안 가본 길로 가본답시고 반대로 나가는 바람에 천마총 담벼락을 따라 그대로 한 바퀴 비잉 돌았다...... 이거 무슨 로드무비는 커녕 시트콤이다. 완전. ㅠㅠ 여튼 해지기 전에 가야한다는 급한 마음에 찾는데, 그래도 이정표가 역시 잘되어있어서 금방 찾았다. 그리고 유적들이 시내에 있는 건 다 고만고만하게 붙어 있어서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더라고.

# 06 - 경주, 첨성대 부근, 오후 4시 반 경

    

첨성대 부근엔 고분군이 있다. 내물왕, 미추왕 등 신라 왕들의 무덤이 그 근처에 있더라. 이미 스러져버린 천년 왕국 신라 왕들이 잠든 무덤 뒤로 해가 지는 모습이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역시나 자전거 타고 가다 울고 말았다. 괜시리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이상하게 보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오히려 더 많이 들어서 좀 한심했다. 첨성대 가는 길에 한 컷, 첨성대를 보고 나오는 길에 두 컷.

# 07 - 경주, 첨성대, 오후 4시 반 경


자전거를 세워두고 첨성대를 봤다. 아마도 허허벌판이었을 이 곳. 과연 첨성대가 정말로 천문대였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돌을 단지 쌓는 것 만으로도 저렇게 유려한 곡선을 만들어내는 솜씨에 절로 감탄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 멋진 건축물이 지반이 내려앉아 점점 기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고. 살짝 고개를 돌리면 함께 눈에 들어오는 고분들과 첨성대에 과거의 더께가 그대로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 가슴 어딘가를 자꾸 먹먹하게 내리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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