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11. 23:30

[] 로드무비 - part. 03. 090108

# 14 - 경주, 숙소 내 방 - 버스 정류장 (국립 박물관) - 불국사

아침에 토스트라도 해 먹고 나올랬는데, 눈을 떠 보니 어느 새 다섯 시 반이다. 서둘러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머리는 질끈 묶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단단히 목도리를 둘러 매고 밖으로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추위가 매섭지 않아 다행이다. 한밤 중보다는 조금 밝은 새벽 하늘. 여섯 시 십 분 첫 버스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급히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수퍼마켓 아주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가니 과연 버스 정류장이. 다행히 정류장 옆에 자전거 주차장이 있었고, 편의점도 있었다. 자전거를 단단히 매두고 편의점에서 꿀물과 삼각김밥으로 요기를 한다. 아직 다섯 시 오십오 분이다.

편의점 안에 좀 있다가 나와서 십일 번 버스를 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갑을 카드 리더기에 대는데, 어라, 안 읽히는 거다. 그래서 잔돈으로 내야겠구나 하고 지갑을 보는데, 어라, 만 원 짜리만 있는 거다. -_-;; 분명 편의점에서 계산할 때 천 원짜리가 지갑에 있다고 봤는데, 당황스러웠다. 나 외에 버스 승객은 단 두 명. 함께 정류장에서 오르신 아주머니와 원래 타고 계시던 아저씨. 먼저 아주머니께 200원만 빌려주십사 말씀드렸지만 지갑을 두고 버스비만 가져 오신 상황. 아저씨께 정말 부끄러워하면서 "저기...죄송한데, 200원만 주시면 안될까요. ㅠㅠ"라고 말씀드리니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아가씨, 버스 탈 때는 미리 준비를 해가지고 타세요."라고 하시며 천 원을 주시는 거였다! 800원이라도 드릴랬는데 사양을 하셔서 허리를 꾸벅꾸벅 굽히며 몇 번이고 고맙습니다를 외치고 버스비를 냈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마냥 타박을 하시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정말 너무너무너무 고마운 분이셨다. 하아. 이번 여행은 정말 로드무비와는 거리가 먼 코믹 시트콤이다. 아침 일찍부터 그런 해프닝을 벌이다니. 그런 해프닝과는 상관없이 버스는 어두운 거리를 계속 달렸다. 이른 아침이라 타는 사람도 별로 없는 어두운 거리를. 불국사 정류장에 내리고 보니 어느 새 여섯 시 이십사 분. 겨울이니 일출 시간이 대략 일곱 시 반 정도.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거리는 책에서 본 대로라면 7.6 km. 충분히 석굴암까지 일출 전에 도착할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길을 걸었다.

# 15 - 경주, 불국사 - 석굴암 산간 도로

그래, 준비 부족이었다. 이번 여행은. 일출을 보러간다는 사람이 어이없게도 정확한 일출 시간을 알아가지도 않았고, 내 신체 능력을 과신하고 있었고, '산'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었다. 정말 열심히 걸었다. 10분에 1km씩 쉬지 않고 계속 걸었으니까. 그것도 오르막길을. 토함산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산은 그 속에 품고 있는 길을 내가 쉬지 않고 걷는 만큼 쉴 새 없이 구비구비 풀어 냈다. 걷고 걷고 또 걸어도 좀체 길은 줄어들지 않았다. 주변이 조금씩 밝아질 수록, 시간이 1분 1분 지나갈 수록 속이 바짝바짝 탔다. 내가 걷는 길 건너편 차선으로 올라가는 차를 잡아타고 갈까라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그런데 미련하게도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발로 끝까지 올라가야될 거라는 생각이, 난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메우고 있었다. 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는 것 같았다. 딱히 누구랑 겨루는 것도 아닌데.

어두운 산 속 아스팔트 길을 걷고 있자니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경주에는 예로부터 비형이나 길달같은 도깨비들도 많았고, 귀신도 많았는데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부터 부처님 도와주세요 등등등 -_-;; 걸음은 늦추지 않으면서 무서움을 쫓으려고 계속 생각하며 걸었다. 아랫배도 슬슬 땡겨 오고, 발바닥엔 물집이 잡혀 오고, 다리는 조금씩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냥 오르는 게 즐겁기 시작했다. 일출을 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을 꾀부리지 않고 하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저 걷고 또 걸었다. 그래도 일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길을 한 굽이 돌 때마다 제발 다음 구비는 동쪽 기슭이라도 되었으면, 동쪽이라서 산자락에 가리지 않고 해라도 보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 시가 다가올 수록 마음은 급해졌다. 지나가는 차를 잡아탈까 생각도 계속 들었는데, 일출 시간이 가까워 급하게 가는 차들을 보니, 나 한 명 때문에 저들의 추억 만들기가 어그러지면 어떻게 하나란 생각에 쉽사리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 수 없었다.

어느 덧 일곱 시가 넘었고, 주위는 꽤 밝아져 있었다. 가장 밝은 쪽이 동쪽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그 쪽 하늘을 바라보며 걸음이 급해졌다. 무심코 길 옆을 보니 내가 막 닿은 곳은 불국사 기점 6 km 지점. 지금 상태로는 빨리 걸어도 7시 40분 정도에야 석굴암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다. 어찌됐든 계속 걸었고, 주위는 완전히 환해졌고, 다행히 석굴암에 거의 도착했는지 동쪽 기슭에는 닿을 수 있었다. 산봉우리들 위로 떠오르는 해. 비록 석굴암에서 보는 일출은 아니었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왠지 석굴암에서 해를 볼 수 있을거라는 미련을 못 버리고, 어슴푸레할 때부터 사진을 찍으며 한 구비 길을 감아 돌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결국은 석굴암 주차장 150m 정도를 남겨 두고, 해는 완전히 떠올라 버렸다. (가장 나중 사진이 7시 49분에 찍은 거네.) 그래도 그 춥고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서 다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올라온 게 장한 거라고, 무섭고 어둡던 길을 오르고 올라 거의 다 온 게 자랑스러운 거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양쪽 발바닥에 물집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발을 이끌고 조금 천천히 석굴암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정말 나 자신도 놀랍게도, 확 트인 석굴암 주차장에 오르자 마자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 벤치로 가서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 버렸다. 정말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올라왔는데, 애타는 마음으로 왔는데 10분 정도 차이로 산 중턱에서 일출을 봐야했다는 사실이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나중에 보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대학원에서 일을 하면서 내가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을 넘겨왔는지를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얼굴도 화끈거리고, 더 분하기도 했다. 지금같은 마음으로 절박하게 모든 일에 매달려 왔다면 이렇게까지 질질 끌지 않았을텐데, 대체 왜 그랬을까, 왜 그리 기운 없이 살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계속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어서 마음이 동해서 하는 일'일 경우에 그렇게 절박했다는 결론이었지만.

어찌됐든, 날마다 뜨는 해에 새삼 새로울 것도 없고, 지금까지 해가 뜨건말건 무심히 자다가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부시시 잠을 깨고 하던 내가 1분 1분에, 해가 조금씩 떠오르는 것에 그렇게 애타하고 절박해 하는 모습을 보며 반성도 되고, 아직 나한테 이런 에너지가 남아있구나라는 사실에 안도를 하기도 했다.

# 16 - 경주, 석굴암

매표소에서 표를 끊는 나에게 어떤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주차장에서 표 끊어도 또 끊어야 하냐고. 잘 모르겠다고, 저도 처음이라 하고 석굴암 일주문 앞을 서성이는데, 그 분이 또 오셨다. 어쩌다 보니 말을 트고 같이 올라갔다. 사진도 찍어주시고.


...졸립고 피곤하고 아까 울어서 눈은 퉁퉁 붓고. -_-; 상태 안 좋아서 사진 조그맣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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