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30. 00:17

[스크랩] 서경식 성공회대 교수 “한국은 30년전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2008년 2월 27일자 경향신문 23면에 실렸던 서경식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발췌.
인터뷰 전문이 좀 길긴 하지만,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우리 학교에서, 사회에서 보이는 일들에서 내가 느꼈던 한계들이 고스란히 서 교수의 말에 담겨있다.
나는 내 주위를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인가.

나는 지식인이 될 것인가, 스페셜리스트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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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사이드가 했던 또 한 가지 중요한 얘기는 ‘지배층의 서사(master-narrative)’에 대항한 ‘억압받은 자의 서사(counter-narrative)’를 대치시키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 여기서 후마니즘, 즉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지(知)에 대해 가르치고, 그리고 종합적인 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학자다, 지식인이다라고 했죠.

- 거기서 스페셜리스트라는 뜻이 인간으로서의 판단을 스스로 중단하고 그런 판단을 안하는 상태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관료, 바람직한 독일 국민,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걸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기계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페셜리스트는 그런 식의 능력이 뛰어납니다. 너는 비행기 100대 만들라고 하면 100대 만들고, 유태인 1만명 죽이라고 하면 1만명을 죽일 수 있는, 요구받은 그대로 그 일을 처리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아유슈비츠 이후에도 “아, 저는 스페셜리스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지식인이라는 말을 안쓰게 되고, 오히려 자신을 “전문가입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이 시대가 바로 스페셜리스트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대학교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권력에서 독립해 있으면서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판단을 포기하고 전문가로서의 특기, 기능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그게 가장 위태로운 세상입니다. 나치 시대나 군국주의 일본시대나 별로 다를 게 없는 시대입니다. 나치 시대나 군국주의 일본 시대처럼 폭력으로, 곤봉으로 때리고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빼앗은 게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교양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눈에 쉽게 보이는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인 통제 논리라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지식인 사회에까지 침투하고, 지식인들이 스스로를 기계화시키고 스페셜리스트화시키는 그런 전체주의적 사회가 일본에서는 벌써 15~20년 전부터 진행됐습니다. 일본에 원래 만연해 있던 다수자, 또는 주류의 탈정치적인 사고 방식에다, 소위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이 더해지자 더욱 그렇게 됐죠. 아까 얘기했듯이, 한국에서도 “아, 저는 지식인이나 그런 것 아닙니다, 그냥 월급쟁이지요” 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많아질 거에요. 그것이 말하자면 사람들의 자기방어의 기제라고 할 수 있죠. 이 사람들이야 말로 아주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학위 얻고 교수가 되는 것만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그래도 즐거움이 있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할 사람들입니다.

-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것은 사회주류가 되고 정규직이 되고, 사회적으로 상승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공유하고 있는데 사회 성원의 대다수가 그렇게 될 수 없어요. 그렇게 될 수 있으면 경쟁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아니지요.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한국에서 삼성의 사원이 되면 사회적인 성공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평생 안정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삼성에 들어간다고 해서 평생 안정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삼성 내부에 들어가도 아주 치열한 경쟁을 겪지 않습니까. 일도 많이 해야 하고. 게다가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삼성의 사원이 될 수도 없고요. 그러니 이렇게 경쟁이라는 논리가 힘이 있죠. 그렇다면 오히려 숫적으로는 배척당하고 주변화되고 낙오하는 사람들이 다수자입니다. 이 다수자는 권력 관계로 볼 때는 소수자이지만, 인구 숫자로 볼 때는 다수자입니다. 이런 다수자는 다수자끼리 힘을 모으는 논리, 논리가 아니더라도 그런 힘을 모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느낌조차도 없어요. 그런 느낌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주류로 들어가 편입되고 싶고 그런 방향으로만 살 수 밖에 없죠. 정신적인 위계제도의 노예가 되는 거죠. 낙오한 사람들, 경계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손 잡고 힘을 모을 줄 몰라요

- 한국 와서 가장 놀랐던 일이 하나 있는데요. 이 나라에서는 상식이라니까, 나는 상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로 깨닫는데요. 연세대에 있는 어떤 교수가 알려줬습니다. 학생들 성적평가를 상대평가로 한다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가르치는 분야가 인문학입니다. 문학·역사·사상을 포괄하는. 학생이 20명 있다고 합시다. 그 중에 30% 정도가 A 학점이다. 어떻게 이렇게 점수를 붙일 수 있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인문적인 처사입니다. 인문학이란 게 모두가 A일 수도 있고, 모두가 낙방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30%를 넘으면 컴퓨터에 입력할 수도 없도록 소프트웨어가 돼 있다고 합니다. 손기자도 고개를 끄덕이시네요. 저는 그걸 듣고 경악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 게 여기서는 상식이에요? 이제는 이명박이 대통령 됐으니 국가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가겠네요? 다른 부분에서는 시차를 두고 한국이 일본의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한국은 일본보다 앞서 있어요. 부정적 의미에서의 ‘선진국’입니다. 지금 일본도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저항이 남아 있으니까 거기까지만이에요. 그래도 그런 걸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물론 인문학 같은 경우 상대평가로 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지요. 저에게 그 얘길 해준 사람은, 31%에게 점수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행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컴퓨터에 지배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에 소프트웨어를 부여하는 사람의 권력에 지배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연세대 교수가 하는 얘기 중에 가장 무섭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가, 그렇게 되면 학생들 서로의 관계가 항상적인 견제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20~30%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지가 학생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습니다. 무슨무슨 보고서를 언제까지 내라고 했는데, A라는 학생이 마감을 지켜서 내고, B 학생은 아프다는 사정이 있어서 못내고 그 다음날 냈다고 합시다. 그런데 둘 다 A 학점을 받았다고 한다면 A라는 학생이 항의한다고 합니다. 불공평하다고요. “나는 마감 지켰고 그 놈은 안지켰는데 어떻게 같은 점수를 주느냐”고요. 학생들이 항상 그런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합니까? 인간의 자유 그런 가치, 학문 자체가 공허화돼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마감을 지켜야 하지요. 그러나 마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으로 학생 스스로가 지키는 거지요. 그리고 남이 못 지켰다고 해서 이 사람을 좀 낙제시키라고 하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

- 그 언어의 내부에는 위계제가 너무 강하게 반영돼 있어요. 다들 언어의 권력관계에 갇혀 있어요. 선·후배 관계라든가, 교사·제자 관계라든가, 아버지·자식 관계라든가 경칭이나 말하는 게 너무 면밀하고 복잡하게 정해져 있죠.

- 가족이란 게 얼마나 억압적인지. 제가 혈압이 높아 강남에 사흘간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제 병실에 6명이 입원해 있었는데. 증상이 가볍건, 중하건 모두가 가족들이 와서 병간호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전부 다 며느리나 부인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그 분들이 항상 같이 있고, 집에서 음식 해가져와서 간병하더군요. 그것을 보며 아름다운 가족애라기보다는 이러면 여성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위독해서 아파 죽을 상황이라면 가족이 와 있어야 하지만, 일본 같은 경우는 가족이라도 허가된 시간만 면회하게 돼 있습니다. 간호사 대신 음식 먹이고 하면 안되게 돼 있습니다. 아, 그러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너무나 차가운 세상이다, 가족이라는 가치가 완전히 무너진 산 지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의 시간, 독립성이 미흡하나마 보장될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의 일을 다 하고 난 뒤에 면회시간에 면회하고 마음의 교류를 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마음은 그런 마음이 없는데, “저기 손씨 집안 며느리가 좋은 며느리네”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그건 권력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조금 더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학교도 다니고, 시험도 봐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해서 병실에 자주 못 나오면 나쁜 며느리, 부인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권력에 대해 문제제기 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사회가 한국사회입니다. 사회 제도상 그렇게 돼 있는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방식, 심지어 언어의 위계질서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 한국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너무 강해서 개인주의자가 드뭅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고립화 돼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동문의식, 동향, 학벌 같은 공동체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외국 유학을 갔는데 일본인 친구가 파리에서 철학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자 가장 친한 친구 1명만 와서 와인 마시며 축하를 해주더랍니다. 한국인들은 한 명이 학위를 받으면 유학생들이 다 모여서 축하를 했다고 합니다. 그걸 좋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학문하는 사람은 철학적으로 적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철저히 비판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한 가족이어서 고립된 독립적인 지식인으로서 치열하게 비판하는 게 아니라, 같이 유학 가서 고생하고 드디어 사회의 주류가 됐다며 축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