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25. 13:43

[] 어쩌면

어제 그제 주욱 게시판을 보면서 별안간 머리를 때린 생각이 있어서 더 우울했던 것 같다.
그의 죽음이 진보신당의 기회를 박탈했다. 아마 최소한 10년 안에는 그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거다.

작년부터 예상했던 건, 이명박 정권 하에서 분명 뭔가 큰 일이 하나 터질 거라는 거였다. 그 큰 일은 누군가가 죽어 엄청나게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킬 일이었고. 이한열 열사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낼 그런 일일꺼라는 막연한 감이었다.

그런데, 그 공분을 자아낼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일지는 몰랐다.

이명박 정권 이래 용산에서 여섯 분이 돌아가시고(경찰까지), 박종태 님께서 돌아가셨다. 내가 보지 못한 아픈 죽음이 또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고, 있어선 안될 일이었음에도, 그들의 죽음은 공분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아마도 수많은 '나'들이 나와 가까운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고, 슬픈 일이지만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원인일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수많은 '나'들에게 긍정으로든 부정으로든 삶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아마 요 몇 년 동안 한국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그 삶에 있어 어떤 식으로든 그가 개입되지 않았던 일이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 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맡은 국가 최고 행정기관의 우두머리였으니까.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 거리로 나오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모조리 불러낼 것이다. 그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이미 사람들은 이명박 정권이 그를 죽인 원흉이라 지목했고, 그에 대한 분노를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아마 진보신당은 아닌, 노무현을 승계할 누군가가 고스란히 받아 떠 안겠지. 그게 앞으로 10년 정도는 유지될 것 같다. 

안타깝지만, 10년 안에는 절대 진보신당에 호의적인 판이 안 깔릴 거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진보신당은 그 에너지를 받아서 추진력으로 삼을 능력이 전혀 없으니까. 내가 아무리 당원이고, 애정을 갖는 내 정당이지만, 그것때문에 모든 걸 좋게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난 정말로 진보신당의 현재 모습은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정치력조차 없는 정치적 결사체라고. 게다가 진보신당은 노무현에 대해서도 칼같이 각을 세워왔고, 지금 눈물 흘리는 보통 사람들을 다 끌어안을 깜냥도 안되니 말이다. 또, 지난 정권에 탄압받았던 사람들이 함께 몸담고 있는 정당이면서도, 그들을 오롯이 위로해주지도 못 했으니. 그렇게라도 제대로 했으면 그 분들이 이렇게까지 공격성을 보이지는 않을 거다. 물론 그렇게 할 상황도 아니었던 게 엄연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가 재임 중에 저지른 여러 탄압 때문에 그의 죽음에 애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증오하시는 분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에 유일하게 그 사람 하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길거리로 나오도록 했던 정치인이며, 대통령이다. 재임 중 한나라당이 탄핵했을 때도, 그리고 그가 죽은 지금도, 사람들은 누가 등 떠밀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어서 거리로 나오는 건 사실이니까. 정말 안타깝지만, 지금까지 대통령 중에서 그가 가장 많은 국민의 사랑과 기대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시대의 비극이다. 스스로가 개혁을 하고 싶어했으면서도, 스스로의 한계에 갖힐 수 밖에 없었던, 진보가 되고 싶었으면서도 소외 계층을 더욱 더 죽음에 가까운 길로 밀어넣어 왔던, 그렇게 해서 좌파의 프레임을 뒤틀어 버리는 비극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진보를 말하고, 좌파를 말하는 사람들을 모두 그의 잣대에 묶어버리고, 묶이도록 해버렸으니 말이다. 분명 그는 개혁을 하고 싶어했지만, 좌파는 아니었다. 철저히 우파였다. 대통령이 자신의 정체성 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고, 보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지금까지 제대로 과거사를 정리 한 번 할 역사적 기회조차 갖지 않았던 국가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니.

어찌됐든 그의 죽음으로 나 역시 그에 대한 애증과 안타까움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의 재임 당시, 그렇게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회 문제에 적극 관심을 보인 것도 아니었지만, 내 삶에서 가장 인상 깊었고, 가장 관심을 가졌고, 가장 애정을 보냈던 정치인이었기에 그의 행보에서 배신감과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보통 사람들의 대통령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 믿음이 완벽히 배신당했으므로.

그랬기에 그가 끝까지 의연하게 이겨내고, 재임 당시 그 당당했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기 때문에 더 상실감이 큰 것 같다. 그 당당함은 그의 상징이자 매력이었으니까. 어쩌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게 그 당당함의 연장선일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말이다.

안타깝다, 진심으로 그가 죽은 게 안타깝고 속상하다. 그리고 진보신당에게 기회가 오기 어렵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래도 이제 부디 저 세상에서는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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