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8. 22. 07:43

[] 배신자들

아. 화난다.
아직까지도 꿈 속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다.
어떻게 그럴수가.

"으아아-"

길옆 강가의 물 속에서 갑자기 검은 것이 불쑥 솟아나왔다.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며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뒷쪽에서 그림자가 휙 하고 스쳐가더니 이내 물 위에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같이 다니던 수행 검사가 내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검사는 한아람이었다.;; ) 요즘 들어서 예전보다 부쩍 마물에게 습격받는 일이 잦아졌다. 수행 검사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지금쯤 저승길에서 헤매고 있을 테지. ;;
나는 수련 여행을 다니고 있는 카드 조합사이다. 마력이 깃든 카드를 이용하여 '힘'을 이끌어 내는 사람이다. 가령, '불'과 '바람'카드를 이용하여 화염 마법을 사용한다던가, '검'카드와 '용'카드, '바람'카드를 이용하여 비룡을 소환해내는 것이다. (아무래도 판마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0-;;; ) 수련을 시작한지 꽤 되어 카드 조합은 자신이 있지만, 지금은 검술 수련 중이었다. 아직 검술은 썩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그대를 수비대장에 임명하노라."
"황공하옵니다."

어느 덧 수련을 마치고 한 마을에 배치되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변방은 아닌 조용한 마을이었다. 배치받기 전, 왕으로부터(불경한가;;) 작위를 하사받고 오게 되었다. 임명식에서 그리도 동경하던 두 장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명은 기개로써, 다른 한명은 용맹으로써 그 이름이 드높은, 나라 안의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동경하고 있는 장군들이었다.

"수고하게."
"축하하네."

비록 짧은 말이나마 그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동이 해일처럼 밀려든다. T_T 이 곳에서 나는 수비대장, 즉 무인일뿐이었다. 내가 원래 카드 조합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심심할때마다 카드 점을 봐줄뿐, 카드 조합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숨길일은 아니었지만, 카드 조합사는 흔한 편이 아니라서 다들 신기한 눈길로 쳐다볼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마을 축제일이었다. 축제라고 해봤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운동회를 하는 것 뿐이지만, 그 마을에서는 1년에 한번뿐인 축제일이었다. 시끌벅적 떠들며 즐거이 웃고 있는 마을 사람들.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와 사람들과 한데 어울리면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람, 새, 눈 카드 조합 - 정찰조"

잠시 자리를 빠져나와 으슥한 곳에서 정찰조를 날려보냈다. 곧 정찰조의 시야에 비치는 것들이 내게 전해져왔다. 아니. 그런데. 저건 뭐지. 마을 어귀에서부터 마물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급히 카드를 꺼내어 들었다.

"구름, 비, 어둠, 번개 - 폭우"

곧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운동장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학교 건물로 들어가도록 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을 지켜야만 했다. 일단 사람들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싸우기로 했다. 이윽고 마물들과 마주쳐 전투가 벌어졌다. 죽여도 죽여도 계속 몰려드는 마물에 밀려, 학교 건물 안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일단 각 통로 입구의 철문을 닫고, (억. 내가 예전에 다녔던 초등학교다! ;;;) 최대한 시간을 벌기로 했다. 그러나 별 소용없이 방어선이 뚫리고, 어쩔 수 없이 각 교실에 잠복하고 있다가 기습하기로 했다. 그런데 교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마물들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교실 문은 잠궜지만, 창문이 절대 안 잠궈지는것이었다! (그...옛날식 창문 있지 않은가...나사 같은게 끝에 달려서 돌려야만 창이 잠궈지는;;;;) 아무리 돌려도 나사가 고정이 안되고 빠지는 것이었다. T_T 창문과 씨름하는 사이에 어느 새 마물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니 고등학교 동창인 김미향이 있는 것이었다! ;;;;

"건투를 빈다."

김미향이 그렇게 말하고는 교실 밖으로 휙 달려나갔다. 다른 곳을 방어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나 역시. 무사하기를-'

카드를 꺼내들고 빼꼼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불덩이를 날려댔다. 번개를 뿌리기도 하고, 바람 칼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야릇한 향기가 나서 보니, 창틀에 뭔가 얹혀있었다. 자세히 보니, 약초로 향을 만든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무력향이라는 것이 떠올라 재빨리 향을 창 밖으로 쳐내었다. 하마터면 무력향에 당해서 모두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을거다. 향을 쳐내니, 이번엔 아래쪽에 난 창문으로 폭약을 던져댔다. 터지기 전에 주워 밖으로 다시 던지기가 얼마나 되었을까. 차츰 지쳐갔고, 결국 폭약 하나를 다시 내보내지 못했다.

"다들 피해!"

지칠대로 지쳐 무거운 몸을 굴려 간신히 책상들을 타고 넘어 폭약의 반경에서 벗어났다. 번쩍- 퍼엉- 폭발로 벽이 무너졌다. 그 작은 틈새로 밀려드는 적과 계속 싸웠다. 품속에 손을 넣는 순간, 아뿔싸. 내 카드가 어느새 창틀에 얹혀진채 새까맣게 그을려 있는 것이 아닌가. 간신히 창가로 가 카드를 집어들었다. 카드 덱을 통째로 들고 탁탁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약간 현기증이 나며 카드가 복구되었다. 카드로 반격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키가 천장에 닿을 정도이고, 온몸이 근육질인 붉은 마물이 복도에 서있는 것이었다.

"누구냐."
"이 군대의 최고 지휘자이다. 항복해라."
"싫다면?"
"복도에 나와서 건물 밖을 보아라."
"나가면 갈기갈기 찢어질텐데?"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나와봐라."

대장격인 마물의 말에 따라 복도로 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에. 정찰조의 눈으로 통해 보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마물이 포위하고 있었다. 학교 밖은 그리 울창하지 않은 숲이었는데, 지금 내눈으로 본 광경은...숲의 나무가 마물에 가리워 하나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을 때, 마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우리가 저 많은 마물들을 어떻게 얻었겠나. 모두 너희가 존경해 마지 않는 그 두 장군의 협조하에 만들어낸 마물들이다. 자, 이래도 계속 의미없는 저항을 계속할 것이냐?"

털썩.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그대로 복도로 쓰러져버렸다. 내 머리 위로 마물의 말이 울렸다.

"자, 사람들을 모두 묶어라. 수도로 데리고 간다."

쓰러진 내 뺨위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아아. 눈물이구나. 뭐가 용맹과 기개냐. 전쟁 한 번 없던 나라에서 어떻게 그런 것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존경해왔다는 것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수비대도 수도로 끌려갔다. 수도로 도착한 후에 보통 사람들은 노예로 끌려가고, 나를 비롯한 수비대는 궁정 안으로 끌려갔다. 마물이 우리를 끌고 간 곳은,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앞이었다.

"호오. 수고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숙소로 음식과 보수를 보내도록 하지."
"그럼 이만."

마물은 몸을 돌려 나가고, 그 장군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흐음. 무인치고는 예쁘군. 여봐라. 이 두 계집은 깨끗이 단장시켜 밤에 내 방에 보내도록 하여라. 나머지는 감옥으로 보내도록. 마을 수비를 소홀히 한 죄다."

너무나도 고결해 보이는 얼굴로 너무나도 상쾌한 말투로 그는 명령했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미웠다.


시녀들의 손에 끌려나가 치장하면서 들은 말에 따르면, 그 두 장군들이 마물을 이용하여 왕위를 찬탈한 것이었다. 아까 만난 사람이 주동자고, 다른 장군은 그를 보필하고있다고 했다. 왕위에 오르면 나라의 3분의 1과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의 목숨을 마물들에게 주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다시 그를 대면하게 되었다. 여전히 사람좋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소름끼쳤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한때나마 무인으로서 당신을 존경했던 내가 바보스러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죄없는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서! 그렇게도 권력을 얻고 싶었나!"

너무도 분한 마음에 드레스 자락을 꽉 움쳐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소리를 치다가 이윽고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나도 분했다. 존경하던 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배신감이 마음 속에 얽혀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너무나...슬펐다..

'내가 만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徽娟] 序 - 시작.  (0) 2004.06.10
[] 金斧  (0) 2004.03.07
[] 꿈  (0) 2003.01.08
[] 대화 2  (0) 2002.12.18
[] 대화 1  (0) 2002.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