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2. 29. 08:06

[] 가시버시 - 유월이 이야기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어둠이 막 내려앉던 적막하던 마당에 구슬픈 곡소리가 세 번 들리더니 이윽고 다시 사위가조용해졌다. 마당 한 구석에서부터 횃불 하나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더니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이구야! 유월아! 아야! 워매, 거기 누구 없는가! 누가 좀 포딱 좀 와보소!”
 새된 비명을 따라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흙바닥을 쓰는 발소리가 줄지어 지나갔다. 다시 한 번 발소리가 지나갈 때는 맨 앞에서 잰걸음을 걷는 장정의 등에 누군가가 업혀 있었다.


“…어째 좀 깨어날 것 같드냐?”
“마님, 오셨는게라. 몇 날이 지났는디 아직은 눈 뜰 것 같지가 않당께요.”
“물러들 가 있게나. 내가 볼 터이니.”
“워메, 저희가 봐도 되는디, 마님께서 하실 긋까지야…”
“물러들 가 있게.”
“예, 그렇게 할게라.”
 마님의 준엄한 말소리에 방을 지키던 사람 두엇이 모두 우르르 나갔다. 마님은 손을 들어 유월의 이마에 붙은 땀에 젖은 잔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냈다. 유월의 창백한 얼굴에 눈가에는 눈물이 설핏 비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유월이 눈을 떴다.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듯 인상을 써가며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안간힘을 쓰며 알아내려 하는 것 같았다. 눈 안 한가득 그 사람이 보이자, 유월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튕기듯 자리에서 일으키려 하였지만, 마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살며시 누르자 묻는 듯한 눈빛으로 마님을 바라보았다. 마님이 옆으로 고개를 살짝 젓다가 끄덕이자 유월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 줄란가?”
 마님의 상냥한 목소리에 입술을 살짝 깨물던 유월의 눈시울이 금새 벌개지더니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베갯잇에 뚝 떨어졌다. 입을 벌리던 유월은 자꾸 목소리가 갈라지는 듯 몇 번 침을 삼켰지만,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마님, 마님. 으흑흑! 마님! 아씨가 돌아가셨어라!”
“…윤지가…죽었다는 말이냐?”
“예에…예에…마님, 어째야쓰까요! 아씨가 돌아가셨어라! 허어엉!”
 유월은 어깨를 들썩이며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그 와중에도 딸을 잃은 마님 앞에서 자신이 더 슬퍼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의 말을 들은 마님의 어깨에 풀썩 힘이 빠지며 마님은 금새 10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마님에게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꿈쩍도 하지 않다가 마님이 긴 한숨을 내쉬자, 멈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냐…그러냐…윤지를 보냄써 뭔가 맘에 걸리드마는…결국은 이럴라고 그런것이었냐…그래갖고 그랬구나…”
“마님…마님…제가 너무 경솔히 입을 놀렸지라…제가 죽을죄를 지었어라…”
“아니다…아니다…차마 남의 입으로 그런 말 듣는 것보다 유월이 너한테 듣는 거이 더 낫다. 걱정 말어라.”
“마님-.”
“걱정말어라-. 윤지가 죽은 거슨 니 잘못이 아니다-.”
 마님은 마디마디 튀어나온 거칠은 유월의 손을 한 번 꼭 쥐어주더니 밀랍처럼 새하얘진 얼굴로 자리를 물리치고 비척비척 방 밖으로 나갔다. 유월은 엎드린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채 울음 소리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입 속으로만 흐느끼고 있었다. 아씨의 죽음. 아씨와 한날한시에 태어나 같은 젖어미의 젖을 먹고 자란 아씨와 유월. 그런 아씨의 죽음을 유월은 마치 자신의 죽음처럼 느낄 수 있었다. 아씨가 죽음을 맞이할 당시의 그 느낌까지 생생하게.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아씨가 마지막 길을 가며 남긴 감정이 원망이나 슬픔이 아닌 가슴 가득 훈훈하게 만들 따뜻한 감정이었단 사실이었다.
‘아씨…아씨…저만 이 세상에 이러고 무사히 살아남아서 정말로 죄송해라…’


그 다음날, 나주 나씨 집안에서는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시신도 없이 꽃상여만 들고 나는 장례. 노제마저 지내지 않고 곡소리마저 없이 집에서 장지로 바로 상여를 들고 나르는 장례가 치러졌다. 따르는 사람들마저도 차마 짧은 한숨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옷고름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상여 뒤를 따르는 장례였다. 그 흔한 상여소리도 내지 않고, 묘자리를 삽으로 팔 때도 흥 돋울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땅을 파고 빈 관을 묻는 그런 흔하지 않은 장례였다. 장례 행렬 맨 앞에 서서 비척비척 걸어가는 유월을 보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젖을 채 떼기 전부터 동네에 누군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소리 높여 울던 유월이었다. 그런 유월이 윤지 아씨의 죽음까지 알렸으니 동네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구설수거리였다. 유월은 마치 홀로 이 세상의 죄는 다 짊어진 듯한 무거운 걸음걸이로 장례 행렬을 이끌었다. 유월이 걷는 길은 유월의 눈물로 시내를 이룰 지경이었다. 그녀가 눈에 띄게 비틀거리자 마님이 친히 나서 그녀의 몸뚱아리를 감쌌다. 유월은 차마 송구스러워하지도 못하고 마님의 어깨에 몸을 맡기며 그저 눈물을 흩뿌리면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윤지 아씨의 장례 행렬은 그야말로 산 사람의 넋마저도 저승으로 끌고 갈 만한 행렬이었다.

 윤지의 빈 꽃상여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부터 마님은 부쩍 유월이를 안채로 불러들이고는 했다. 심지어는 마님의 수발을 들던 장흥댁 대신 유월이를 마님의 몸종으로 쓰고자 하였다. 집안 하인들은 마님의 그런 행동을 보고 고개를 갸웃해하긴 하였지만, 늘 이치에 맞게 행동하시는 마님이신지라, 그다지 큰 의문은 갖지 않고 곧 자신들의 일을 찾아 총총히 사라지곤 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줄 터이냐?”
 “그것이…오늘은…아, 그렇지. 아씨가 시집가시기 바로 전 이야기를 해드릴게라, 마님.”

 마님은 윤지의 기이한 장례를 치른 후, 유월이를 불러 윤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늘 부탁하던 차였다. 다른 집안일을 하면 힘들까봐 몸소 자신의 몸종 자리에 유월이를 불러 두고 늘 딸에 대한 그리움을 유월이의 이야기로 달래곤 했다. 배움의 속도와 어짐과 지혜가 뛰어난데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남편과 자신의 기쁨을 한 몸에 받던 아이였다. 윤지와 시를 주고 받으며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던 남편의 모습이 생각나 마님은 잠시 그리움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던 아이였고, 규방 규수로 마냥 아무것도 모른 채 자라나게 하기엔 충과 효를 날카롭게 꿰뚫던 아이였다. 혼담이 들어와 몇날 몇일을 영감과 이마를 맞대고 고민하였고, 결국은 딸의 혼약에 허락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했는지 모른다. 윤지를 남원으로 보내고서도 딸의 생각에 밤마다 가슴을 태우며 눈물짓곤 했다. 그토록 총명하고 착하던 딸을 피붙이 하나 없는 먼 곳에 보내고서 얼마나 애닲아 했는지. 딸을 보내고 밤마다 영감과 마주 앉아 애끓는 마음을 시로 지어 보며 달래본 것이 몇 달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사실 딸을 시집보낸 것도 사돈댁의 애타는 청이 없이는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애지중지 아끼던 딸이었던가. 단지 무남독녀 하나뿐인 딸아이여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재주가 남달라서 곁에 놓고 이것저것 가르치며 키우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그런 윤지가 죽었다니. 죽었다니. 난리가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겠다고 떠난 남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할 지 생각만 해도 목이 메어왔다.

“그때가 오월 단오였지라. 아씨가 열다섯 생일을 맞기 한 달 즈음 전이었지요. 아씨나 저나 같이 유월에 유두 지나 났으니까 말입니다. 단오날 영감 마님을 뵈러 한 무리의 선비들이 찾아왔었지라. 쩌- 멀리 남원에서도 유 생원님이 오셨구요. 그 냥반이 비록 높은 벼슬은 못했지만 서도, 그래도 사람 됨됨이가 남다르고 집안에 그 뭐시냐, 집 안에 법도가 넘쳐 흐른다 해가꼬 그 동네서 상당히 평판이 좋으신 냥반이라고 했지라. 그래서 그 분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심써 흥을 돋군게, 급기야는 마님이 가야금도 한 자락 타시고, 아씨도 그 출중한 솜씨로다가 어른들께서 지으신 시에 대꾸도 하시고 그랬지라. 근디 그 아씨의 재주에 그냥 그 남원 냥반이 반해부러가꼬 자기한테 올해 열여섯 묵은 아들넘이 있응께 혼인을 시키자고, 그러-케 사랑채에 두어달을 돌아가시지도 않고 눌러 앉아가꼬 영감 마님을 성가시게 하더니 기어-코 혼인 약속을 받아가꼬 돌아가셨지라. 사실 그 성혼을 한 것이 아씨가 다- 그냥 알아보고 그 집안에 그 도령이면 괜찮것다고 확답을 하셨응게 그러게 한 것인디 그 냥반은 그것도 모르고 영감 마님이 그저 자기가 좋아가꼬 허락해주신지 알고 그러게- 좋아함씨로 남원에 가셨지라. 그해 추석이 채 지나기 전에 사주단자가 오고 가고 함이 오고 가믄서 혼인은 착착 진행이 되었는디 그 때 또 마침 아씨가 영감 마님과 마님 내외분 모르게 시를 한 수 지어가꼬 사주 단자에 같이 넣어 보내신게라. 영감 마님이랑 마님은 저-언혀 모르고 계셨는디, 나중에 함에다가 그짝 남원 도령 시가 한 수 실려 오믄서 이차저차한 내용을 알게 되셨지라. 근디 그 시를 비교해본께 운율이고 표현이고, 그 도령 시 한 수가 우리 아씨 시 한 수보다 영 못했지라! 아니, 한 수가 아니라 열 수, 스무 수 였어도 모자랐겠지라! 역시 우리 아씨는 엔간한 도령이고 선비고 비교해가꼬 몽땅 다 쌈싸드셔버릴 재주가 있으셨던게라. 아니, 글고 보믄, 아씨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수도 잘 놓으셨재, 바느질도 잘 하셨재, 길쌈도 잘 하셨재, 그 뿐인게라? 글도 곧잘 읽으시고 경전에 뜻도 곧잘 혼자 해석을 하셨지라! 그 왜 흔히 하는 말에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란 말이 있는디, 워메, 우리 아씨는 열 뿐이당가! 스물이고 서른 아들도 안 부러울 아씨였지라! 안 그런가요, 마님? 우리 아씨는 그깟 남자들한테 비길 데가 아니였지라! 그렇게 혼담이 성사되고 양쪽 집이 왔다갔다 함씨로 혼인 날은 설 지나기 전에 잡자고 하믄서이, 세밑 곧 전에 혼인을 하기로 했지라. 워메-. 그 해 겨울은 왜 그리도 눈도 그러게 폴폴 내리고 춥고 그랬는지, 결국은 겨울 지나고 눈 다 녹은 담에 삼짇날 후 볕좋은 날에 혼인하기로 잡을 수 밖에 없었는게라. 아니, 생각을 해 보씨요, 그 눈이 그러게 많이 내려가꼬 동네 뒷산도 못 넘어간디 어뜨케 지리산 자락을 끼고 넘어가꼬 나주서 남원까지 간답니까! 안 그런가요, 마님? 근디 또, 다행인거시 그러게 미뤄가꼬 잡은 그 날은 얼마나 날이 좋았는지! 차말로 흥부 집, 놀부 집에 가있어야 할 제비들이 다- 그냥 우리 집에 와가지고는 처마 위를 훨훨 날아댕기고 그렇게 낭랑하게 울어댈 수가 없었지요! 지지배배 우는 그 꼴이 ‘아씨 잘 됐소, 아씨 잘 사씨오!’ 그렇게 들립디다! 진짜 우리 하인들도, 이, 어뜨케 보므는 참으로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었는디, ‘아따 차말로 아씨 잘 되셨다! 이러게 날 좋고 볕 좋고 제비 노래하는 날 시집 가신디, 어쩌고 못 사실수가 있을랑가!’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당게라. 그날 영감 마님이랑 마님께서도 날이 기양 느무 좋아버린께 흐뭇-허니 웃고 계신디, 저희같이 밑에 있는 사람들은 기분이 을마나 좋았겠습니까! 날이 좋응께 아씨 표정도 더 훤허고, 대문 지나 들어오는 사위 표정도 훤합디다! 워메, 그거를 또 말씀드려야것구만이라이! 그날 그러게 훤헌 날 솟을 대문 지나가꼬 조랑말 타고 들어오는 사위가 보이는디, 아따 그 도령, 얼굴도 훤허고 신수도 훤헌거이 우리 아씨랑 그냥 찰떡궁합이시거뜨만요! 뭐, 사람이 꼭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 입가에 사마귀보다는 작고 보통 점보다는 조금 큰 그 점이 살짝 걸리기는 했지만서도, 조랑말에서 도령이 딱 내리는디! 워메, 아씨랑 나란히 스므는 그냥 그거이 그림이 따로 없게 생겼읍디다! 차말로, 우리 마님들 사위 잘 얻으셨다, 우리 아씨 서방님 잘 얻으셨다 이럼씨로 저희 밑에 것들도 기분 좋게 그냥 바지런히 움직였지라. 그 날은 마님께서 이것저것 시키시지 않으셨어도 저희끼리 그냥 다 알아가꼬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당께라. 너무나 기분이 좋아가꼬는 우리끼리 콧노래를 부름씨로 ‘아나, 받아라, 아나, 가꼬가라’, 이러고 일을 했지라. 그림 한 폭에 기양 다 못담을 만한 우리 아씨 혼인식이 지나고는 다들 쉬러 돌아갔지라. 아니 근디, 이 놈의 하인들이 짖궂게도 아씨 첫날밤 방을 엿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냥 그 긴긴 밤을 만복이 오라버니랑 저랑 둘이서 아낙들 물리치느라 눈 한 번 못 붙이고 꼴딱 새었지라. 근디, 그거이 기분이 좋은거시, 우리 소중한 아씨를 그깟 짖궂은 아낙들 하룻밤 구경꺼리로 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만복이 오라버니랑 그냥 둘이 마주보고 싱긋 웃음씨로 얼마나 좋아했는디요. 우리 아씨, 우리 소중하고 아리따운 아씨, 하믄서요. 그러게 저희 둘이서 지킨 첫날 밤을 맞으시고는 한 두어달 더 있으시다가 아씨는 남원으로 떠나셨지라, 서방님과 함께, 그리고 저랑 만복이 오라버니를 대동하시고라. 저도 그렇고 만복이 오라버니도 그렇고, 어릴 때부터 아씨만 봐오고 산 사람들이라 아씨랑 떨어져블믄 그날로 목숨까지 떨어져 나갈 사람들이었지라! 워메, 우리 마님 웃으시네! 마님 웃으시믄 아직도 꽃같으신디, 어째야쓰까! 여튼, 아씨 시집 가실 때 혼자 안 가시고 저랑 만복이 오라버니 데꼬 가신거시 차말로 잘하신 일이지라. 아씨도 좋으시고, 저도 좋고, 만복이 오라버니도 좋고… 글고 영감마님이랑 마님께서도 맘 든든허니 편허고 좋으셨재라. 솔직히, 저희 둘 아니믄 아씨 그러고 맘 편허니 잘 뫼실 밑에것들이 또 있었겄습니까, 안그럽니까, 마님? 저희 둘인게 맘 놓고 아씨 뫼시라고 허락하셨겄지라. 차말로, 남원으로 떠나던 그 날도 볕이 참 좋았습니다. 산길 막고 호령할 범도 아씨랑 서방님 보므는 어이구, 눈 부셔라, 하고 도망갈 거 같았당께요.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남원까지 가는 중에 다치는 사람 하나 없이 무사히 갔지라. 이거이 다 아씨를 하늘이 사랑해서 그런거 아니겄어라.”
 마님은 조용히 웃으며 손을 저었다. 유월이는 바싹 마른 입을 물로 살짝 축이며 뒤로 나앉았다. 이제 피곤하니 그만하면 됐다, 가서 쉬거라, 내일 계속하여라, 라는 마님의 말없는 표시였다. 유월이는 나붓이 절을 올리고 뒷걸음질로 방을 나섰다. 장지문을 탁 닫고 돌아서는 유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지금이야 한창 좋을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지마는, 곧 내일 저녁부터는 아씨가 시집가셔 마음고생한 이야기, 그에 이어 돌아가실 당시의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유월이는 아씨가 돌아가실 때의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다. 왜놈들이 밀고 올라온다는 사실을 듣고 아씨는 시어머니는 하인들을 딸려 시어머니의 친정으로 보내드리고, 자신의 친정에서 데려온 식솔들도 다시 친정으로 돌려보냈던 것이었다. 유월이는 안가고마고 그렇게 버팅겼지만, 서릿발 같은 아씨의 호통에 겨우 나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같이 돌아오려 그렇게 찾던 만복이는 보이지 않아 유월이 혼자 나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원래부터 신기가 있던 탓인지, 아니면 아씨와 한날 한시에 태어나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던 탓인지, 유월이는 아씨가 돌아가실 무렵의 일을 마치 눈으로 본 듯, 아니, 직접 겪어본 듯 훤히 알 수 있었다. 그 날, 집안일을 하다 풀썩 힘없이 곡소리를 내며 쓰러지던 그 날, 아씨는 꽃이 지듯 돌아가셨고, 마음 가득 환한 웃음을 안고 돌아가셨다. 느껴진 바로는 만복이도 아씨와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 한날 한시에 아씨와 유월이 태어났듯, 아씨와 만복은 한날 한시에 저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 날 쓰러지기 직전 느낀 아씨의 죽음에 유월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고통에 외마디 곡소리만 겨우 내고 풀썩 쓰러져버린 것이었다. 아아, 아씨, 아씨, 우리 아씨, 꽃같고 별빛같던 곱디 고운 우리 아씨!


 스륵, 탁. 만물이 잠들어 있을 삼경에 창호문이 열렸다 닫혔다. 오른손에 염주를 들고, 눈썹엔 눈송이가 내려 앉은 듯 희끗희끗 흰 눈썹이 보이는 스님이 방 안에 들어섰다. 입가에 자리잡은 조금 큰 점 하나가 단정한 인상을 조금 흐트러지게 보이는 듯 했지만, 큰 흉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호롱불 밝힌 방 안에는 머리를 야무지게 틀어 올려 쪽진 부인이 오른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소승을 어쩐 일로 이 야심한 시각에 부르셨습니까?”
“이 늙은이 세상 시름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니 불제자께서 말벗이나마 되어 주시라고 기별을 넣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어차피 눈 감으면 잊혀질 풍진 세상에 무에 그리 맺혀 계셔 잠마저 못이루신단 말입니까.”
“가지가지 세상에 창피하고 분한 일이 많아 그렇습니다. 공덕만 쌓아도 모자랄 이 세상에 이리 마음 어지럽게 만드는 일이 많을지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허, 보살님께서 그러시다니 저마저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어디, 어떤 사연인지 소승에게 말씀이나 해보시지요.”
“며늘애기 때문에 세상 보기가 창피해서 그럽니다. 난리가 벌어졌다고 식솔들을 다 뿔뿔이 흩어 돌아가게 하더니, 사내랑 같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지 뭡니까! 그것도 제 친정에서 데리고 온 머슴놈 품에 안긴 채로 죽어있더랍니다. 아니, 혼인한 지 한 해가 채 안되서 제 시아버지 잡아먹고, 남편 잡아먹더니, 죽을 때는 또 그렇게 죽고. 도대체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리 많아서 제가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한답니까! 늘그막에 얻은 귀한 자식 그렇게 보내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렇게 창피한 일을 겪게 하고. 제 남편 죽을 때 따라 죽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이렇게 집안에 먹칠하지 않았을텐데. 도대체 생각이 있는 아이였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처녀 적에 박식하고 재주 있는 아이였으면 뭘한답니까. 집안 단속 제대로 못해 계속 불화 일으키고, 급기야는 죽을 때 마저도 수치스러웠으니. 이것 참, 며늘애기 하나 잘못 들여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지 뭡니까. 정말 남보기 부끄러워서 원 참. 그 애가 들어온 다음부터, 곳간 열쇠를 제가 쥐고 놓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곳간에 들여놓은 곡식이고 뭐고 슬금슬금 축이 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제 친정에서 데려온 종들 더 잘 멕이려고 그랬겠죠. 아녀자들이 살림을 책임지면, 낟알 하나라도 철저하게 잘 계산해서 챙겨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아이는 그걸 못하더란 말이에요. 자꾸만 낟가리 수가 비니, 이걸 어찌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시집을 왔는데도, 아이가 안 생기더랍니다. 원체 우리 집안이 손이 귀한 집안인지라, 저만해도 여기 와서 백일기도를 올린 다음에야 상현이를 낳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보니 그때가 벌써 이십여년 전이군요. 그 무렵에는 스님도 저도 참 좋을 시절이었는데, 이제는 흰머리만 느는군요. 아무튼, 아이라도 들어서야 제 남편 마음이 잡힐 텐데, 합방도 싫다, 제 남편도 싫다 그러니 사내가 무슨 재미가 있어서 집에 들겠어요. 마음이 집 안에 머무르지 않으니 발길도 자연히 밖으로 돌게 되는 거죠. 이것이, 시집 와서 별당에 떡하니 들어앉더니 대체 별당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이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안 생기던 아이가 생긴 것을 상현이가 죽은 다음에 알았으니 말이죠. 계집종들 말을 듣자 하니, 상현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혈을 했다지 뭡니까. 아니 그런데, 그 아기가 상현이 아기인지, 아니면 별당에서 그 머슴놈과 더러운 짓을 해서 가진 아기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렇게 마다하던 제 남편 아기일 리가 없지요. 어떻게 전쟁터에 나가기 바로 전에 아기가 들어섰겠어요. 제 남편 자리 비운 사이에 몹쓸 짓을 한게죠. 어휴, 기가 막혀서. 우리 바깥 양반은 그런 아이 어디에 반해서 며느리로 들이려고 그러셨는지. 하여간, 그 아이가 집안에 들어온 뒤로 잘 되는 일이 없었어요. 차라리 난리통에 죽은 것이 다행입니다.”
“허어...상현이가 죽었단 말입니까...아미타불...”
“...생전에 스님을 아버지 못지 않게 잘 따르던 아이였으니 상심이 크시겠군요...”
“다 부처님 뜻 아니겠습니까.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리에 드시지요. 소승은 물러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말벗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삐걱, 탁. 창호문이 닫혔다. 댓돌 위에 내려선 스님은 창호문을 바라보았다. 꼿꼿이 앉은 부인의 그림자가 창호지 위에 아른거렸다. 이윽고 호롱불이 꺼지며 방 안은 어둠에 잠겼고, 스님도 문에서 눈길을 거두고 염주를 헤아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쟁반에 차와 주전부리를 담아 들고 유월이 안방으로 들어섰다. 마님은 보료 위에 바로 앉아 서책을 보고 계셨다. 유월이 서탁 옆에 쟁반을 내려 놓자, 마님은 책에서 눈을 떼고 유월을 향해 잔잔히 웃음지어 보였다. 유월은 서탁 앞에 살짝 비껴 앉았다. 마님이 차를 잔에 담아 들자, 유월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남원 유생원 댁은 안방 마님이 엄격하게 규율을 잡고 있는 집안이었어라. 곳간 열쇠도 마님께서 쥐고 절대 놓지 않으셨고, 아씨께 살림을 맡기려고도 하지 않았지라. 아씨께는 별당을 내어줌씨로 너는 여기서 살거라, 하시고는 집안일을 가르쳐줄라고도 안하시고, 혼자서 다 하셔브렀당께요. 시어머니가 그래븐께, 어디 그 집안 종년들이 아씨를 존경할 수가 있었겄습니까. 며느리 취급도 못 받는 며느리라고, 그것들도 아씨를 우습게 봐브렀지요. 거기다가 서방님이 알고 보니 오입쟁이였답니다. 그 나이에 여기저기 다 들쑤시고 다닝게 그 동네에서는 도저히 신붓감도 못찾고 그러니까, 아씨같이 똑똑한 규수며는 서방님이 맘잡고 살끄 같아서 유생원이 아씨께 청혼을 한거였답니다. 워메- 그런 난봉꾼이 다시 돌아갔으니, 아씨 곁에서 얌전히 살았겄습니까.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글공부 하시라는 아씨 말에 역정을 내며 곡식이나 빼돌려서 계속 오입질을 하고 다닌거지라. 그 빼돌린 거슨 다 아씨 탓으로 돌려버리고요. 사람이 그러게 밖으로 나도니 아이가 생길리가 없었지라. 어디가든 사랑받고 사실 아씨였는디, 유독 그 집에서는 아씨를 받아들이지를 않을라고 했당게라. 아무리 봐도, 늘그막에 귀허게 얻은 자식이라고 오야오야 키운 것이 분명했지라. 게다가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 절대로 서방님을 손에서 안 놓을라고 했어라. 자기가 다 쥐락펴락 해야 직성이 풀려븐 냥반이라서 서방님이랑 아씨 일도 다 자기가 감 놔라, 배 놔라 해야 하는 냥반이었어라. 그럴라믄 아들 단속이나 쪼까 잘할 것이지 그러게 놔두고서 뭘 어짤라고 그랬는지 몰르겄당게요. 여튼 그렇게 나돌다가, 하루는 술이 잔뜩 취해가꼬는 서방님이 별당에 들이닥친게라. 그 때가 아마 난리가 났다고 전쟁터로 나온나, 하고 명령을 받았을 때였지라. 손이 귀헌 집 외아들이라고 마님이 어뜨케 어뜨케 빼볼라고 하셨는디, 그거이 맘대로 되는 일입디여. 나라에 난리가 났는디, 나라에서 그런 사정 하나하나 다 봐줄리가 없었지라. 어쨌든 어쩌코어쩌코 빼돌릴라다가 안된께로 서방님이 고주망태 인사불성이 되가지고 들이닥치셨지라. 아씨는 서방님을 잘 달래가꼬 재울라고 했는디, 이 노무 난봉꾼이 아씨 말을 듣지를 않았지요. 별안간 방에서 아씨 비명이 들려 저랑 만복이 오라버니가 들어가서 뜯어말리려 하는디, 술취한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 그렇게 야리야리하게 생긴 사람이 힘이 그렇게 셉디다. 만복이 오라버니도 얻어 터지고, 저도 직사하게 맞고 늘어져서 방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지라. 귓가에 아씨 울음 소리가 쟁쟁한디, 눈도 떠지도 않고,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어 가슴만 발기발기 찢어졌지라. 워메, 마님, 울지 마셔라. 내 이래가꼬 얘기 안할라 했는디. 울지 마셔요-. 오늘은 그만 할까라? 아, 알거씁니다. 계속 해야것네요. 어쨌든 다음 날 새벽닭이 울 무렵에 서방님이 나가시고, 방에 들어가보니 아씨 옷고름이 다 튿어져 있고, 헝크러진 머리로 아씨는 흐느끼고 계셨지라. 아씨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오히려 아씨께서 저를 달개주셨어라. 어찌나 죄송하든지요. 여하간 그렇게 서방님이 전쟁터에 나가시고 얼마 안되서 비보가 날아들었지라. 그 소식에 유 생원 어르신께서 쓰러져 돌아가시고, 간신히 태기가 나타나던 아씨도 그만......안방 마님은 아씨보러 저년이 남편 잡아먹었다고, 시아버지 잡아먹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고, 그 집 종들도 아씨만 보면 수근수근댔지라. 그런거 아니라고 얘기를 해봐도, 괜시리 저까지 머리채 잡히기 일쑤였지라. 만복이 오라버니는 하인 놈들 여럿 쥐어패다가 몽둥이 찜질도 예사로 받구요.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채를 잡히고 몽둥이 찜질을 받았습니다. 아들 잃고 남편 잃은 그 심정이야 알 것 같지만, 피붙이 하나 없이 남편 믿고 사시던 우리 아씨는 남편도 잃고 애기씨도 잃고 시아버지까지 잃었으니, 그 심정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요! 그러고 아씨는 그 살얼음판 우에서 위태롭게 한걸음 한걸음 옮기고 계셨답니다. 꽃같던 두 뺨도 시들어 버리고, 별같던 두 눈에서는 빛이 사그라들어버리셨지라. 저나 만복이 오라버니나 매일매일 눈시울이 벌게지지 않은 날이 없었지라. 그렇게 가시방석 위를 살다가 왜놈들이 여까지 오고 있다고, 그런 소식이 전해진게라. 온 집안 식구들이 우왕좌왕한디, 의연하게 아씨가 시어머니께 그러셨지라. 왜놈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친정으로 가시라고. 마님 친정은 정읍 쪽인게 여기보다 안전하실거라고 가솔들 데리고 가시라고 그랬어라. 목숨은 부지하고 싶었능가 마님이 그 얘기는 들으시대요. 그래가꼬 세간 다 정리해가꼬 다들 정읍으로 떠났지라. 아씨는 같이 안 가시고 가솔들 다 배웅하시고는 별당에 그대로 남아계셨어라. 아씨가 저랑 만복이 오라버니도 보낼라 그러시길래, 그러믄 아씨 혼자 어쩌고 계시냐고 펄쩍펄쩍 뛰었지라. 근디...근디...아씨가 웃으시대요. 시집에 들어가시고 처음으로 저를 보고 웃으셨어라.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어차피 부질없다고. 이렇게 꺼져들며 살 바에야 집을 지키다가 죽고 말겠다고. 그러셨어라. 그러면서 어서 떠나라고 호통을 치시는데, 그 서슬퍼런 기색에 간신히 절을 올리고 길을 떠났지라. 아씨를 그때 뫼시고 왔어야 하는데...그랬어야 하는데...이 미련한 것이 잘못했어라, 마님. 저를 죽여주셔요. 허어엉. 만복이 오라버니처럼 어디 숨어라도 있다가 뫼시고 왔어야 된디, 잘못했어라, 마님. 엉엉엉.”
  “울지 마라, 울지 마라. 그거이 윤지가 택한 길이니 어찌할 것이냐. 그 아이가 한 번 한다고 했으면 하지 않았느냐. 집에 왔어도 윤지는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울지 마라. 울지 말고 유월이 니가 느꼈던 윤지 죽을 무렵 이야기나 해다오.”
  “허엉, 흐윽, 흑흑. 제가 집에 돌아오고, 끅, 며칠이 지난 후에 일이지라. 끅끅, 저녁을 지을라고 부엌에 들어갈라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당게라. 흑, 아씨가 보는 듯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디, 만복이 오라버니가 아씨를 업고 산길을 막 달리고 있었어라. 남원 집은 불타고 있고라. 그래서 막 오라버니가 뛰가는디, 아씨가, 아씨가, 웃으시대요. 웃으시면서 오라버니 등에 이마를 대시더니 아씨 눈이 감겼어라. 그렇게 힘드셨으면서도 원망이고 슬픔이고 다 떨쳐내시고, 웃으시면서 눈을 감으셨어라. 아씨는 웃으시며 가셨지마는, 저는 억장이 무너졌지라. 겨우 곡소리만 내고 쓰러졌지라. 아씨를 덮치던 암흑이 저까정 덮치는 바람에 아씨의 기색을 찾기가 힘들었지라. 마님, 마님, 아씨가 웃으며 돌아가셨어라. 그렇게 힘들었는디도 웃으셨어라. 어허엉, 아씨, 아씨.”
 유월은 방바닥에 얼굴을 묻고 통곡을 해댔다. 마님의 주름진 얼굴 위로 눈물 한 줄기가 흘
러내렸다. 이미 저 세상에 가버린 윤지의 생각을 하는 것은 황천에서 떠도는 시간만 더 길게 할 뿐일 테다. 훌훌 털고 저 세상에 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은 뇌리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님은 손을 들어 통곡을 하는 유월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마님은 유월이를 일으켜 품에 안았다. 엉엉 우는 유월의 등을 다독이며 마님도 유월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소리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어느 덧 바깥은 어두워졌고, 창호지에 조그마한 그림자가 하나씩, 둘씩 어리기 시작했다. 사라락, 사라락,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늘어나는 눈송이는 함박눈이 되어 떼가 채 자라지 않은 봉분없는 윤지의 무덤을 덮고, 울음소리 가라앉은 나씨 집안도 덮고, 이미 불타버린 남원 유생원 집과 시어머니가 기거하는 암자와 병장기 소리 가득한 전쟁터도 소리없이 덮고 있었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윤지의 웃음꽃이 되어 세상에 내리고 있었다. 어느 덧 유월의 울음도 잦아들고, 마님도 눈물을 거두었다. 눈물을 거둔 마님은 창호문을 드륵 열고 눈송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눈송이를 움켜쥐었다. 윤지의 웃음꽃이 녹아든 그 손을 품에 갖다댄 마님은 눈을 감았다. 유월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윤지의 웃음이 마님의 눈 앞에도 떠오르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윤지의 웃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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