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5. 07:21

[] 허상의 조각, 둘

끼익-.
바쁜 통에 오래 관리를 못해서 그런지 급기야 문이 열리며 비명을 질러댄다.
그래. 알았다. 좀 이따 식용유라도 발라주마. 조금만 참아.
속으로 문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며 방금 들어온 손님에게 자리를 권했다.
 
- 어서 오십시오.
- 저어...광고 보고 어제 연락드린...
- 네. 잘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용건은 천천히 말씀하셔도 되니, 이쪽으로 오셔서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 아, 네.
- 어떤 걸로 드릴까요? 레몬티, 보리차, 둥굴레차, 녹차...어디보자, 인스턴트 커피도 있군요. 하핫
- 음...레몬티로..
-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무료하시면 탁자 위에 아무 책이나 보셔도 되구요.
 
냉장고 문을 열고 설탕에 재어둔 레몬을 꺼내며 오늘 손님을 찬찬히 살펴 본다.
크게 유행을 탈 것 같지 않은 단정한 생머리.
렌즈가 아닌 무테 안경.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심플한 귀걸이.
귀걸이와 같은 세공이 들어간 펜던트.
짙은 녹색 브이넥 니트에 검은 슬랙스, 약간 녹색 빛이 도는 벨벳 플랫슈즈.
무릎 위에 얌전히 놓아둔 검은색 핸드백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 네번째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
그리고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탁자 위만 훑고 있는 시선과 잔뜩 긴장해 꼿꼿이 서있는 등, 단단히 붙여져 있는 두 무릎.
 
조금은 긴장 풀어도 될텐데. 이 곳은 이상한 곳이 아니니. 내가 당신 잡아먹을 것도 아니라구요, 손님.
이렇게 생각하며 탁자에 찻잔을 놓았다.
딸그락.
작은 소리에도 흠칫 어깨를 떠는 손님.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제가 직접 재어둔 거라 맛이 꽤 좋을겁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 네. 잘 마시겠습니다.
 
조심스레 한 모금을 마시는 손님. 후루룩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마신다. 찻잔을 놓을 때도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거의 없이.
 
- 아. 맛이 정말 좋네요. 향도 좋아요.
-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음 그게...
 
표정이 다시금 살짝 굳은 손님은 티스푼을 들어 차를 휘저었다. 빙빙빙. 찻잔 속에서 도는 저 차가 그녀의 마음일까.
찻잔을 응시하던 나는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말을 꺼냈다.
 
- 준비가 되시면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쉬이 얘기하실 순 없을겁니다.
 
몇 번 더 차를 휘젓던 손님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 전...약혼자가 있어요.
- 네. 그럼 그 반지가 약혼 반지겠군요?
- 그렇죠. 그런데...결혼을 앞두니 고민이 생기네요.
- 흔히 그렇지 않나요? 앞날에 대한 불안이라던가.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건요.
- 하하. 여기까지 찾아온 게, 그런 문제 때문일거라 생각하세요?
- 전 그저 그렇다고 한 것 뿐입니다. 편하게 얘기하시길 바라니까.
- 뭐. 제 말대로 여기까지 왔는데, 얘기해야겠죠. 음. 어디부터 해야하나...
 
머리를 살며시 쓸어 넘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저는 제 약혼자랑..그러니까..섹스를 하는 게 그리 즐겁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니까 함께 잠자리를 하긴 하지만...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요. 평소에는 참 그 사람이 좋은데, 섹스를 할 때면, 내 위에서 헐떡이며 움직이는 사람이 과연 그 사람이 맞을까 하는 생각만 들고. 즐겁지 않아요. 그렇다고 피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차마 직접 말할 수도 없고. 고민을 하던 차에 광고를 보았어요. 처음엔 이게 뭐야 했는데, 한 번 찾아가보자라는 생각에 찾아왔구요. 어떻게 해야 할지. 차마 친구들에게 말하기도 뭐하니까. 굉장히 고민되더라구요. 자존심도 상하고. 병원에 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구요.
- 다른 분들도 많이 겪는 문제입니다. 절대 특이한 게 아니십니다. 연인과의 섹스는 즐거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드리기위해서 저같은 섹스 코디네이터들이 있는 거랍니다.
- 사실 오기가 망설여졌던 게, 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혹시 선생님과 직접 몸을 맞대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어서..
- 하하. 많이들 그 부분에서 걱정하시더라구요. 아주 가끔 그런 극적인 처방을 내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담을 통해서 해결하는 편입니다. 대신, 혼자 오시는 것보다 약혼자 분과 함께 오시는 편이 문제 해결엔 좋습니다.
- 하지만...같이 오자고 하면 길길이 화를 내며 날뛸거에요.
- 남성분들께서 자존심이 상해하시기도 하더군요. 특히나 이런 은밀한 사항에 대해서는. 그렇지만 그런 부분에서 용납을 못하시는 분이라면 앞으로도 조금 힘드시지 않을까요? 조기에 해결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라도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단 오늘은 질문지를 드릴 테니, 작성하셔서 다음 상담 시간에 가져와 주세요. 최대한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이 답변이 솔직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지니까요.
- 네..그럼 다음 상담은 언제..?
- 내일 이 시간 어떠신가요?
- 음..잠시만요..네, 괜찮겠네요.
-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네, 안녕히 계세요.
 
끼익-. 다시 한 번 문이 열리고 손님이 나갔다.
방은 창 밖의 가로등 불빛만이 비치는 휑뎅그렁한 방으로 다시 변했다.
사람의 들고낢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외로운 방.
나의 작업실.
그리고 떠나버린 너를 그리는 나의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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