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4. 22. 08:07

[] 기다림

  까페에 들어와 컵받침만 만지작거린지 벌써 30분째건만 아직도 약속 시간 15분 전이다. 어제 그녀의 전화를 받고 두방망이질치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긴 밤을 지새우고 나왔음에도 피곤함은 저 구석에 어슬렁거린 채 도통 내게는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겼을까, 나이는 나보다 얼마나 어릴까, 얼마나 고운 차림새로 내 앞에 나타날까. 쓸데없는 궁금증이 수족관 속 물고기처럼 떠돌았다. 떠돌던 물고기들이 금방이라도 수족관을 뛰쳐나오려 할 때 쯤 누군가가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지만, 곧 그녀가 내가 기다리던 그녀임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금은 푸석한, 눈밑이 약간 거무죽죽해진 얼굴, 묘하게 상기된 낯빛, 잘 정돈된 머리. 핸드백을 움켜쥔 가지런하고 예쁜 손톱. 약간은 통통한 몸에, 하얗고 통통한 손. 몸에 잘 맞는 청바지와 라인이 슬림하게 들어간 티셔츠.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길거리에서 마주친다해도 굳이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확인할 만한 외모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자였다.
 
 까페 점원이 다가와 주문할 차를 물었고, 그녀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나지막하고 조금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는 시럽이 들어가지 않은 아메리카노. 커피가 나올 때까지 그녀는 그저 핸드백만 만지작거린 채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아메리카노가 예쁜 컵받침 위에 놓였고, 그녀의 손은 핸드백에서 찻잔으로 옮겨가 여전히 만지작거림을 계속했다. 그다지 길지 않은 평범한 속눈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그나마 그녀의 모습 중 가장 예쁘다고 봐줄만 한 손톱 못지 않게 예쁜 입술은 입매가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가 도무지 입을 열지 않듯, 나 역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을 부여안고 있던 어젯밤 그토록 생각했던 질문들은 모두 목구멍 속에 움츠린 채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한마디가 그녀의 입술을 따라 그녀의 어깨로 흘러나왔다. 그 말은 그녀의 어깨 위에서 조용한 떨림이 되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하죠?"
 침착하려고 애쓰던 지난 40여분간이 무색하게 내 목소리는 새되게 갈라진채로 그녀의 떨리는 어깨 위로 내리꽂혔다. 나는 다시금 말했다.
 
 "무엇을 왜 죄송하다고 생각하시는거죠? 우습군요. 잘못이란 것을 알면 처음부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될 것을."
 
 이번에 내뱉은 내 말은 둔중하게 그녀의 눈으로 떨어졌다. 얼핏 그녀의 눈에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고이는 눈물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제게 애써 전화까지 하면서 만날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저 모르게 지내면 됐을텐데. 왜 화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자초하셨나요?"
 
 "..."
 툭. 그다지 정성들여 다듬지 않은 것 같음에도 예쁜 손톱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투툭. 컵받침 위에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봐요, 울지 말아요. 마치 내가 울린 것 같잖아요. 내 앞에서 눈물 연기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테니,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간혹 보던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나 듣던 진부한 대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테이블 위로 떨어진 말들은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져 테이블 주위를 맴돌았다.
 
 "...계속 제가 속이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나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 없었어요.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했지만, 그만 둘 수 없었어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너무 멀리 와서 돌아갈 수 없었어요."
 
 그 말의 뒤를 이어 내뱉어진 말들은 쐐기가 되어 내 가슴에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박혀갔다. 만난지 어느 새 8년이 되었다. 다섯살 난 아이가 하나 있다. 처음부터 그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를 속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를 끔찍히 사랑한다. 내게 알린다고 했을때도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가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던졌다. 결국 나를 만날 결심을 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와 함께 사는 집이 있다. 우리 집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
...
...
 
 쐐기는 그 뒤로도 연달아 날아왔고, 더 이상 내 가슴에 쐐기가 박힐 공간이 없어질 즈음에야 겨우 쐐기가 다 떨어졌다. 어딘가 후련해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된 내 얼굴과 너무나 비교되는 것 같아 환한 까페의 창을 모두 검고 두터운 커튼으로 가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은 모조리 다 나를 비껴나가, 그녀의 젊은 모습만을 더욱 밝게 빛나게 해 주었다.
 
 "이렇게 만나뵙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몰라요."
 
 나지막히 까페 바닥으로 가라앉는 말이 뱀이 되어 내 다리를 스물스물 기어올라와 목을 칭칭 동여매었다.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그와 헤어지기라도 하라는 말인가요?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나를 만나자고 한건가요? 단지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내게 풀기 위해 만나자고 한거라면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당신이 책임지지 못한 당신의 죄책감이 내 모든 것을 휘저어 엉망으로 만들거라는 것은 생각치 못했나요?"
 
 차마 내뱉지 못한 이 말은 내 가슴을 타고 또아리를 틀어 더욱더 숨이 막혀왔다. 손을 더듬어 핸드백 안의 담배를 찾았다. 이 곳은 금연 구역이라는 생각에 핸드백 속을 더듬던 손이 멈칫하며 하릴없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이제 저를 만날 목적은 다 이루신거죠?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아, 벌이가 그렇게 좋으신 편은 아니라고 하셨죠? 계산은 제가 나가면서 하도록 하지요."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가며 우스울 정도로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일어섰다.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하이힐을 신은 발에 힘주어 걸음을 옮겼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암팡지게 휘어잡고 흔들고 싶은 생각을 애써 머릿 속에 꾹꾹 우겨 놓으며 계산을 하고 까페를 나섰다.
 
 사실 남편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와 죽이 잘 맞아 이야기가 잘 통하고, 취향도 비슷한 듯 달라 그와 함께 있으면 즐거웠으며, 적당히 다정다감한 그런 사람이었다. 나이가 찼다며 나를 못살게 구는 주위 어른들의 성화에 못이겨 한 결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대가 그이기에 결혼을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담배연기라면 질색을 하는 나지만, 신기하게도 향수냄새와 약간 섞여 그에게서 나는 엷은 담배냄새는 못 견디게 매력적이었으며, 그 냄새를 맡지 못하는 날이면 잠을 이루기도 힘들었다. 사실 그라면 언제까지라도 인생의 동반자로써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29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내 옆자리에 스스럼없이 서기를 원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결혼 한지 9 년만에. 내가 이런 일을 당하도록 만들었다. 추호도 의심하지 못했던 그가. 만난지 8년이란다.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녀를 만났다. 내겐 없는 아이가 그녀에게는 있다. 내겐 없는 젊음이 그녀에게는 있다. 나는 받지 못하는 사랑을 그녀는 받는다. 그녀는. 나는. 그녀는. 나는.
 
 정신없이 핸드백을 뒤져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에게서 나는 담배향에 혹해 결국은 피우기에까지 이른 담배. 매캐한 연기가 눈으로 올라와 가슴 속을 파고 든다. 담배를 든 손이 힘없이 떨어지며 구두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건. 방금 전 있었던 일 때문이 아니다. 단지, 평소엔 눈으로 가지 않던 담배연기가 눈에 들어가 눈이 맵기 때문이다. 그저 반사 작용일 뿐이다. 나는 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햇볕 따가운 봄날에 담배 연기가 눈에 들어가 나는 눈물일 뿐이다. 그래. 그저 그런 것 뿐이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들어 가 비벼 끄고 나면 그뿐일,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그런 눈물이다. 그런 눈물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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