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8. 07:22

[] 허상의 조각, 셋

나같은 섹스 코디네이터들에게는 규율이 있다.
 
첫째. 내담자와 사적인 관계를 갖지 말 것.
 
둘째. 내담자와 나눈 얘기는 절대 어디서도, 아무에게도 발설치 말 것.
 
이 외에도 사소한 규율들이 있긴 하지만,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고, 가장 큰 사단이 일어나기도 하는 일들에 대한 제재가 바로 이 두 조항이다.
 
섹스 코디네이터란 이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심리 치료사나 상담자 중 성에 관련된 부분만을 전문적으로 맡아 상담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일반적인 상담자나 정신과 의사들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부분을 좀더 마음 편하게 상담할 수 있도록 한달까.
살아가면서 성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는 의외로 생각보다 많으니까.
어쨌든 우리도 카운셀러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저 두 조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했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막 햇병아리 섹스 코디네이터로 세상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내 곁에는 선배 코디네이터가 있었다.
간혹 우리의 역할을 의심하는 내담자의 배우자들이 난입하여 상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보통 두 명이서 같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명이 상담을 수행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일종의 가디언 역할을 하는 식으로.
그리고 가디언이나 모니터링 외에도,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내담자에 따라서 다른 코디네이터들이 상담을 맡기도 했다.
뭐. 가장 큰 이유는 금전상의 문제였으니까. 하핫.
신출내기가 당장 번듯한 상담실을 차릴 여유가 어디있겠나.
그러다보니 가장 친하고 마음 잘 맞았던 선배에게 얹혀살게 된 것이었다.
 
우리 상담실은 고즈넉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평범한 원룸이었다.
2층 원룸을 상담실로 쓰고, 5층 건물 옥상에 자리잡은 옥탑방이 살림집이었다.
상담실이 너무 휑하면 내담자들이 편치 않다고, 두 공간으로 나누어 아기자기 꾸며놓았었다.
나처럼 simple is the best! 라고 외치는 삭막한 인간이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역시 선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배 집에 굴러들어온 1년 동안은 일종의 수련 기간이었다.
선배를 방문한 내담자와의 상담을 모니터링하고,
학교에서 배운 것과 실제 상담의 차이를 깨닫고 메꾸어가는 기간이었다.
 
내담자를 맞을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내담자가 쉽게 긴장을 풀고 이야기를 하게 하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제스쳐를 취하고, 어떤 화제를 던져야 하는지.
 
선배는 방학만 되면 늘 인턴을 하며 끊임없이 실습을 해서 그런지,
나보다 일년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능숙하게 상담을 진행했다.
그다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웃음.
좋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
내담자에게 긴장감이나 부담감을 주지 않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매력은 있지만, 이성으로써의 긴장감은 느끼지 않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편하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드는 면모도 있었고.
 
그 당시 선배에겐 약혼자가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연인이었고, 선배가 자리잡히는 대로 결혼을 하기로 했었다.
나도 선배를 쫄래쫄래 따라나가 그 사람과 몇 번 정도는 식사를 하기도 했고,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었다.
선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늘 마음속으로 행복을 빌어줄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그 둘을 떼놓을 수는 없을거라고.
 
그러던 어느날.
내가 선배와 함께 산 지 2년이 지났을 때.
결국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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