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20. 08:02

[] 가시버시 - 수정

 

쾅!

장지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에 부딪혔다. 곧은 모습으로 도도히 타오르던 호롱불이 잠시 춤을 추다 이내 들어오는 바람에 팍하는 소리를 내며 꺼져버렸다. 서책을 읽던 눈에 희미하지만 어두운 방바닥보다 더 검게 드리워져 제 있음을 알리는 기다란 그림자가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 곳에는 방안을 거의 가리다시피 문지방에 올라서 있는 사내의 형체가 보였다.

[게 누구냐.]

[아씨, 저구먼요.]

낮고 굵직한, 질펀한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 못 알아 볼 레야 못 알아 볼 수가 없는 만복이의 목소리였다. 시집으로 온 후에는 여간해서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만복이가 이 시간에 예까지 온 걸 보면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게다.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만복이를 꾸짖었다.

[늦은 밤에 이 깊숙한 규방까지 남정네가 어인 일이더냐.]

사실 왜놈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미 시댁 가솔들은 모두 시어머님의 친정으로 보내버렸다. 어차피 한 집에 들어앉아 사이좋게 목숨을 바치느니 한 목숨이라도 더 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차라리 단 하루만이라도, 죽어도 좋으니, 그들의 시선이, 숨결이, 목소리가 내게 닿지 않았으면 했다. 나를 따라왔던 가솔들도 그들이 가는 김에 친정으로 돌려보냈었다. 기울어가는 기와집 별채에서 기울어가는 달을 보며 앉아있는 그 심정이, 나마저 기울어가는 듯 한 심사가 자꾸만 마음속에 들어앉았다. 요 며칠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던 차에, 만복이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눈물이 울컥 터져 나올 듯했다.

[아씨, 시방 고런 말 하고 앉아계실 때가 아니랑께요. 밖에는 난리가 났어라. 언넝 짐 싸시쇼. 저랑 같이 도망가야 한단게라.]

[무슨 난리가 났기에 내가 너와 함께 어디를 간단 말이냐.]

[아따, 목숨 줄이 경각에 달렸는디 어째 고렇게 답답한 소리만 하고 계시쇼잉. 퍼뜩 짐 싸시랑게요. 소식 못들으셨는게라? 왜놈들이 벌써 여까지 밀고 올라와븠는디, 고것들 눈에 사람이 뗘블믄 그냥, 눈에 띈 데로 다 그냥 죽여븐다 그럽디여.]

영 굼뜬 모습을 보이는 내 모습에도 만복이는 차마 역정은 내지 못하고 나를 사근사근 달래며 채근한다. 어렸을 때부터 울던 나를 달래 삽시간에 벙긋 입을 벌리고 웃게 하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는 그 답다. 이렇게 가깝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대체 얼마만이던가. 이런 상황에서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나고 만복이는 만복이다. 이젠 예전처럼 살갑게 그의 말을 대뜸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일부종사할 몸, 서방님 뒤를 따르련다.]

내가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올만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혼인한 뒤에 시집에 와서 얼굴을 본 적이 손에 꼽을 만한 그 사람을, 그 사람 혼자만 믿고 친정을 영영 떠나 마음 부스러기 하나 붙일 데 없는 곳에서 몸뚱아리 하나 붙이고 겨우겨우 살아가도록 만든 그 사람을, 따라가겠다고 내 입으로 말하고 있다. 삼도천을 건너다가 행여나 그 사람이 저 건너편에 나를 마중 나왔다고 하면 다시 뒤로 도망쳐 이 세상으로 돌아올 만한, 그런 그 사람을 내가 따라가겠다고 스스로도 믿지 못할 말을 내 뱉는다. 아무리 내 말이라면 콩떡을 찰떡으로 알아듣는 만복이라고 해도, 믿을 리가 없다. 이렇게 내 목소리가 스스로도 깨달을 만큼 떨려서 나오는데, 만복이가 그것을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아따, 눈이고 귀고 싹 다 막혀브렀소, 잉? 내가 시방 어떤 맘으로 이러고 말을 한지 그렇게 못 알아먹겄소! 대감마님이랑 안방마님이랑 아씨 여움써 나를 딸려 보낸 것이 뭣 땀시 그런 것 같소! 여차하믄 나보고 아씨를 지켜달라고 그런 것 아니겄소! 글고, 글고, 고렇게 오랫동안 나를 옆에다가 두고 본 아씨가 그라시믄 안되지라. 아무리 서방님께서 왜놈들이랑 싸우다가 돌아가셔브렀다고 그래도, 아무리 근다고 해도, 아씨가 이러고 암것도 안해블고 고놈들 손에 곱게 목숨 바쳐서 돌아가셔 블믄, 내 맘이 어떻겄소, 잉? 아조 갈기갈기 찢어져블제! 아씨, 고놈들이 여까정 오기 전에 포딱 인나서 가잔께라!]

[...]

[고러고 앉아있을 때가 아니랑게 그라네, 이! 언넝 짐 싸시란 말이요! 도망도 가기 전에 내가 여그서 속 터져 디져블믄 아씨 속이 그냥 편하겄소? 그런거요, 이? 기어코 내가 역서 꼬꾸라져블어야겄소!]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거라. 왜놈들이 여까지 밀고 올라왔으믄 친정으로 가도 못하잖느냐. 어디로 가잔 말이더냐.]

[...아씨, 아씨를 모시고 가믄 산 속에서 화전 일구고 살아블어도 저는 좋아라. 일단은, 이, 도망부터 가고 보잔께요.]

[...]

[아씨, 아씨, 제발 부탁이요, 내가 아씨보고 가시버시 살자고까지는 안할게라. 내가 아씨 여운데까지 따라온 것이, 아씨 하나만 보자고 온 것인디, 아씨를 요러고 그냥 보낼 수는 없어라. 시방 여즉꺼정 아씨 한 분만 맘에 요러고 모시고 살아왔어라. 아씨를 일단 살려 놓고 봐야 내가 산단께요. 아씨가 여즈껏 이뻐라 한 머슴놈 목숨 하나 살려주는 셈 치고 같이 가셔라. 잉? 지발 부탁이요. 내가 앤간하믄 이런 말까지는 안할라고 그랬는디, 아씨는 내 목숨이나 마찬가지요, 긍께 언능 나랑 같이 가잔께라. 아, 언능 안 일어스요! 보퉁이 언넝 싸갖고 나오시쇼잉!]

어두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만복이의 목소리는 애타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같이 가자는, 나랑 같이 가자는 만복이의 저 말을 내가 조금만 어렸던 시절 들었다면, 그 때 나는 망설임 따위 없이 선뜻 만복이의 뒤를 따라 나섰을까. 이제 와서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지만.

[알았응게 나가 있어라. 내 언능 짐 싸갖고 나갈텐게.]

어렸을 때부터 친 오라버니처럼 그렇게 따랐던 머슴 만복이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산길을 달렸다. 구름에 채 가리다 만 보름달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만복이의 손에 이끌려 나온 집을 쳐다보니 어느새 불길이 치솟아 있었다. 혼인한지 채 한 해도 되지 않아 서방님이 돌아가신 후로 외로이 갇혀 가시방석에 앉아 지내는 듯 한 기분을 느끼게끔 한 집이 활활 타고 있었다. 나를 얽어매던 보이지 않은 동아줄 역시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나마 가시방석 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친정에서부터 따라온 몸종 유월이와 머슴 만복이가 곁에서 알게 모르게 힘이 돼 주었기 때문이리라.

아무것도 모른 채 시집을 가야만 했던 열여섯 가을.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는지 모른다. 혼인날이 다가올수록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치른 혼인식이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아픔으로 가득 찬 첫날밤을 가까스로 넘기고, 어느 덧 시댁으로 가야할 날이 왔다. 나를 따라 시댁으로 가는 종들 중에 만복이와 유월이가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가 되었었다.

나와 같은 젖어미 젖을 먹고 자란 여동생 같은 유월이와, 그리고 나를 그리도 아껴주던 만복이. 이녁들이 내 곁에 남아준다는 것이 그렇게도 안도가 되었다.

허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해가 갈수록 달라지던, 만복이가 나를 바라보던 눈길이었다. 그래, 사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나와는 영원히 맺어질 길이 없다는 사실을 둘 다 잘 알고 있었고, 나는 이미 혼인한 몸이며, 만복이는 그런 사실들을 무시한 채 나에게 추근덕댈 인물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내가 마음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서방님이 돌아가신 뒤로, 나는 집안의 표적이 되었다. 애지중지하며 키운 외아들이 싸움터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든 뒤로, 나는 더 이상 이 집안에서 '아씨'가 아니라 '서방 잡아먹은 년'이 되었다. '나'라는 존재는 그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소리가 들려올 때면 유월이는 늘 나 몰래 사라졌다 눈이 붉어진 채 돌아왔고, 만복이는 언제나 양 주먹을 꾹 움켜쥔 채였다.

그래서 만복이가 이 밤중에 안채로 뛰어 들어와 내게 도망가자고 말했을 때, 뛸 듯이 기뻤었다. 다만, 기꺼운 마음에 내가 이 자리를 서슴없이 내팽개치고 도망가도 될지 망설임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이 집안과 나를 이어주던 연결고리가 없어진 이상, 나를 얽어맬 것은 이 집안 어디에도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눈앞에 나타난 소중한 손을 잡았고, 그 손은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고 있다. 내 눈앞을 채우고 있는 것은 사방을 답답히 메운 벽이 아니라, 땀에 흠뻑 젖은 만복이의 넓은 등이었다. 그 넓은 등이 내 눈을 가득 메우고, 내 마음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만복아...]

[아씨, 지금 말하믄 힘빠진게 그냥 암말안하고 뛰는 것이 낫소.]

[...만복아...]

[아, 깜박해브렀소. 아씨가 이러고 산길 내달리는 것은 소라운 일이 아닌디, 나같은 상것이나 맨날 다니는 길인게, 아씨겉은 분은 힘이 들 것인디, 미처 생각을 못 했서라. 차라리 나한테 업혀갖고 간 것이 빠르고 아씨도 편하시겄지라?]

[...그래 그것이 낫겄다.]


아씨를 등에 업고 나는 듯이 산길을 내달렸다. 이 천한 놈의 마음에 담는 것이 아씨께 누가 될까 두려워 차마 제대로 아씨를 쳐다보지도 못하던 세월이었다. 아씨가 시집가신단 말에 아씨를 따르겠다고 꼭 보내주시라고 대감마님께 매달린 것이 석달 열흘이었고, 내 그러마 하는 대감마님 확답을 듣고 미칠 듯이 기쁜 마음에 아씨 혼인날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뒷산 용소까지 소리를 지르며 날듯이 밤마다 산길을 뛰어 올라댔던 것이 벌써 두 해 전이다. 어차피 아씨를 넘보지도 못할 놈의 팔자, 아씨 곁에서 평생 지켜드리며 사는 것이 둘도 없는 원이었다. 아씨가 첫날밤을 치르시던 날, 짓궂은 아낙들이 창호지에 구멍 뚫고 구경하려는 것을 멀찍이서 막아내느라 그날 밤 내내 잠을 설치며 우리 아씨 제발 행복해지시라고 마음  속으로 몇 백, 몇 천 번을 빌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놈의 세상은 왜 우리 아씨를 가만히 두지 않는지 모르겠다. 왜놈들이 쳐들어 와 나라가 어지러워지더니, 서방님을 앗아가고, 우리 아씨 얼굴에서 웃음까지 앗아갔다. 유월이 말을 듣자하니, 서방님께서 왜놈 칼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아씨 얼굴이 파르르 떨리며 방바닥에 주저앉으시더니 이내 아씨 치맛자락에 피가 스몄다고 한다. 불쌍하고 불쌍한 우리 아씨. 그리고 세상 구경도 채 못하고 스러져버린 불쌍한 우리 아기씨.

아무튼 그날 이후로 우리 아씨 얼굴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음 의지할 서방님과 듬뿍 정을 줄 아기씨까지 한 번에 잃어버린 우리 꽃 같던 아씨는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게 내 눈에는 뻔히 보이는데, 아씨는 이 집안에서 위로는 못 받을망정, 온갖 흉한 소리만 온몸으로 받고 계셨다. 울분을 삭히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다 뭇매를 받은 것은 몇 번이요, 밤마다 뒷산에 올라 주먹으로 바위를 쳐대며 소리를 질러댄 게 몇 날인지 모르겠다. 유월이 년은 하루가 멀다 하고 눈물을 흘려댄 통에 눈이 벌게지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왜놈들이 들이닥친다는 말을 듣고 옳다 이때구나 하는 마음에 냅다 안채로 달려 들어가 아씨를 뫼시고 나온 것이었다. 규방 한가운데서 서서히 말라 들어가는 우리 아씨, 별 같던 두 눈에서는 빛이 사라지고, 꽃 같던 두 뺨은 이미 시들어버린 우리 아씨.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모습으로 계시는 아씨를 보자 여태껏 꾹꾹 눌러왔던 울화가 터져버렸다. 미련스럽도록 착한 우리 아씨는 이 집구석이 뭣이 좋다고 그렇게 가지 않겠다고 뻗딩기는지 모르겠다. 이놈의 더 이상 타들어 갈 데도 없는 가슴은 모르고 그렇게.

차라리 이놈이랑 도망가서 가시버시삼고 살자고 그러고 싶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하나 없는 천한 몸이지만, 아씨 마음 편하게 뫼시고 살 자신은 있었다. 내 몸뚱이 하나 힘들면 얼마든지 아씨는 뫼시고 살 수 있었다. 우리 아씨 더 이상 시들어 갈 일 없이, 두 눈엔 다시 별이 빛나게 해 드리고 싶었고, 우리 아씨 뺨에 다시 꽃이 피게 해드리고 싶었다.


[만복아, 험한 산길인디 나까정 업고 달릴랑게 많이 힘들지야?]

[아씨, 그런 말씀 마시쇼. 아씨가 요즘 얼마나 말라브렀는지 모르시는게라? 깃털도 하나 안 얹은거 맨치로 한개도 힘든거 없은게 맘 편히 업혀 계시쇼. 왜놈들을 피할라믄 동트기 전에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쓰겄소.]

[만복아.]

[아씨 무서우신게라? 자꾸 말 시키시네잉.]

[만복아, 나 너랑 가시버시해도 암씨랑안해야.]

[아씨, 그런 말쌈 하시믄 안되어라!]

[아니여, 내가 여태껏 내색을 안했다뿐이재, 니 맘은 내가 다 알고 있었씨야. 나를 바라보던 눈빛도 내가 다 알고 있었고, 이, 니가 나 땜에 속 끓여싼 것도, 니가 나 따라온다고 아버지께 몇날 며칠을 졸라싼 것도 내가 다 알고 있어야.]

[아씨...아씨...]

목이 멘 듯한 만복이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만복이의 등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히 읊조렸다.

[긍께 우리...깊고 깊은 산 속에 꼭꼭 숨어 갖고는, 우리를 알아볼 사람이 하나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가갖고는, 이, 우리 둘이 가시버시 살아블자.]

깊은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고, 산짐승을 잡고, 산나물을 캐며 살아가는 모습이 얼핏 눈가에 스쳤다. 그 곳에서는 만복이의 주먹은 더 이상 쥐어지지 않았고, 유월이의 눈물도 없었다. 오직 나와 만복이의 웃음이 있을 뿐이었다.

[아씨...]

만복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나는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힘없이 감겨오는 눈앞에는 만복이와 내 웃음만이 가득했다.

[그러자 만복아, 잉? 그러자...]


등이 축축한 것이 땀이 나서 그런지, 우리 꽃같은 아씨가 내 등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려서 그런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듬이질하는 것 같던 심장이 아씨의 말을 듣고 나서는 냇가에서 아낙이 빨랫감을 두들겨대는거 맨치로 두방망이질을 쳐댔다.

[아씨 쫌만 참으씨요, 잉. 진짜로 암도 못찾는 산 속으로 내가 들어가블랑께, 힘들어도 쫌만 참으씨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서 그런지 자꾸만 눈 앞이 흐려졌다. 아씨를 업고 뛴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리가 욱씬거리면서 자꾸 풀리는 바람에 몇 번을 고꾸라질뻔 했는지 모른다.

[아씨 쫌만 더 가믄 된께 쫌만 참으쇼, 쫌만...]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여 아씨께 말을 걸었다. 아씨께 거는 말인 동시에, 내게 거는 말이었다. 힘을 잃지 않도록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아씨를 끝까지 모시고 갈 힘을 얻기 위한 기원이었다. 풀려가는 다리를 이끌고 힘겹게 수풀을 헤치는데, 골짜기가 가까웠는지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지친 몸을 쉬어갈 겸 물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골짜기 널찍한 바위에 올라 조심스레 아씨를 등에서 내리는데 어째 뭔가 이상하여 나직이 아씨를 불러보았다.

[아씨, 괜찮으신게라? 아씨!]

아무리 부르고 흔들어도 아씨의 굳게 감긴 눈은 다시 뜨일줄을 몰랐다. 내 흔들리는 등 위에서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씨의 말라버린 얼굴에는 다시금 웃음꽃이 엷게 피어있었다.

[워메, 아씨. 이것이 뭔일이라요! 아씨! 눈 좀 떠보시요, 잉? 나랑 가시버시 살자매요, 암도 모르는 곳에 가서 같이 살자매요! 어쩔꺼나, 어쩔꺼나, 우리 아씨. 워매. 아씨. 아씨!]

힘없이 바위위로 털썩 주저앉아 아씨를 품에 껴안았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아씨는 이제라도 눈을 반짝 뜨고, 만복아 놀랐지 할 것만 같았다. 엷은 웃음이 남아있는 아씨의 뺨에 뺨을 갖다대었다.

[아씨, 인자 좀 편해지셨소, 잉?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 뭐였을까 궁금해라. 기왕이면 이 못난 놈 생각해주느라 웃고 가신 거믄 좋을 거신디 그거는 너무 큰 욕심일랑가요? 허허, 허허...다음 생에는 이러게 힘들게 살지 마시고, 내가 나랑 가시버시 사는 것까지는 꿈꾸도 않을텡께, 제발 다음에는 행복하게 사시쇼. 이 못난 놈 마지막 바램이요.]

한없이 가벼운 아씨를 다시 들쳐업고 일어섰다. 일어서는데 내 오른쪽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따, 아씨, 아씨 외로울까봐 산신령님이 신경 좀 쓰셨는갑제라? 나도 오래는 못버티겄소. 언제 내가 고 왜놈들 총에 맞았블었을까. 다리가 풀리는 이거이 힘이 들어갖고 근것이 아니라 총에 맞은거였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가 솔찬히 많이 나블었구만이라. 기왕이면 목숨 끊어질 때까지 아씨랑 멀리멀리 가볼라요. 근것이 낫겄지라, 아씨도? 인자 고만 쉬고 갑씨다.]

입에서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씨를 보내는 진혼곡이고, 나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장송곡이었다. 이 풍진 세상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떠나고자 하는,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밝았으면 하는 나의 바램이었다. 노래가 끝이 날 즈음 눈 앞이 캄캄해지며 다리가 풀려 비틀거렸다. 애를 써서 발걸음을 떼었다. 무릎이 풀썩 꺾이고, 이윽고 땅바닥이 다가왔다. 차가운 땅바닥이 내 대신 노래를 이어불러주었다. 손을 더듬어 아씨를 꼭 끌어안았다.

[충분히 멀찍이 왔는가 모르겄소...동틀 때까지 꼬박 걸어야 포도시 산 속으로 들어갈 것인디...근디 인자 여기가 끝인거 같소...기왕이면 아씨랑 같이 갈라요...다음 세상에서 만날지 안만날지 모르것소만은, 우리 담 생에는 맘 끓이는 일 없이 행복하게 살아븝시다...]

자꾸만 감겨오는 눈을 치뜨며 아씨의 마지막 웃음을 한껏 마음에 담았다. 웃음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마음에 아씨의 웃음이 담길 곳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내 웃음이 아씨의 웃음이고, 아씨의 웃음이 내 웃음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산 속에서 그렇게 아씨와 내가 한 가득 함께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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