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7. 27. 07:31

[] 어째서인지

어째서인지 중학교 이전에 나를 만났다가, 내가 과학고로 진학한 것을 모르는 친구들은 나를 만나면 놀라곤 한다. 내가 이과로 갈 줄은, 그것도 과학고-KAIST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아주 당연히 나는 문과 계열로 진학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단다.
 
왜인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 의아했다. 그 당시, 중학교 때 그 친구와 함께 과학영재교실을 다니고 있었고, 나는 당연히 내 진로는 이과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좀 단순한 인간이다. -_-)
 
(하긴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사람의 재능이라는 것은 이과-문과 혹은 인문계-실업계-예체능계라는 지극히 단순한 잣대로 잴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긴 하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서는 저 친구가 오히려 나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는고 하니, 석사 졸업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상황에 맞닥뜨리고 보니까, 나에 대해서 하나씩 되돌아보게 되더라. 그런데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보니까, 사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더라. 물론 이런 생활 좋아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적어도 이 길에 대해 내가 어떤 흥미나 관심거리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어떤 현상에 대해 나는 그것 참 재밌구나, 그런 것도 있구나라고 느끼고 나면 그 이상은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 호기심이야말로 science를 하기 위한 뿌리이고 기초이건만.
 
내 지적 성향과 재능은 자연과학 연구계열보다는 문학 계열에 오히려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나를 뒷받침해 온 것은 다양한 문학 작품이니까,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문학에서 거의 괴리되고, 지적으로 가장 메말라있는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지만.
 
내가 왜 이렇게 지금 하는 일이 재미없고 하기 싫은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내 자신의 전공 수준 부족,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불화와 갈등, 빡빡한 실험실 생활,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다. 그러나 내가 정말 연구를 하고 싶어서 왔다면 저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고, 또한 뛰어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것이며, 이 지경이 되도록 나를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 오기가 있고,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도 있고, 나름대로 능력도 있고, 완벽을 기하려 하는 사람이니까.
 
아주 얌전하게 공부만 하면서 살아온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과오는 바로 아무 생각없이 그저 얌전히 공부만 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꿈도 목적도 의문도 품어본 일 없이, 하고 싶은 일도 없이 그저 학교 성적에만 충실히 살았다는 것.
 
이제와서 아주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그저 남들이 얘기하는 소위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걸로 인생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 그 이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고, 말잘하고 똑똑하단 소리를 들었으면 뭐하나. 내가 내 길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데.
 
어려우니까, 힘드니까 발빼고 도망가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이 일을 하기 싫은건 아닌가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수없이 생각한 끝에 단지 어려워서 이 길을 가기 싫은 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난 평생 이 길을 걸을 각오가 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도망가는건 아닌가도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단지 그런 문제인건 아니더라.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라, 그리고 왠지 자존심이 상해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몰랐던 것이다. 이 길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내 진로와 적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고, 단지 그 알량한 학교 성적에 기대 여기까지 왔다. (그나마 학부 성적은 좋지도 않다만.)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사실 지금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혹은 되고 싶은 확고한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주 어렴풋하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
 
그렇지만 지금 내게는 다시 한 번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졸업 후 무엇을 하고 싶은 지에 대해서는 확고한 생각이 있다. 그러니까 하기 싫어도, 적성이 아니라도 조금만 더 꾹 참고 좀더 고생하고 노력해보자. 하기 싫다고 지금을 던져버릴 수는 없는 거니까.
 
기억하자.
고생 끝에 낙이 오며, 두드려야만 열리는 것이다.

'끄적끄적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몸은 정직하다  (0) 2006.08.23
[] 나  (0) 2006.08.14
[] 언제나  (0) 2006.08.10
[] 늙는다는 것.  (0) 2006.04.20
[] Art - Eroticism  (0) 200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