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6. 10. 07:37

[] 어느 나그네

[아아. 또 어디론가 엉뚱한 곳으로 잘못 떨어져버렸군.]

한 젊은 남자가 머리 뒷부분을 만지며 땅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다.
엷은 보라색에 금실로 수가 놓여진 깔끔하면서도 어딘가 귀해보이는 옷차림이다. 몸을 일으킨 그는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손가락 끝에 흙을 묻혀 냄새를 맡아본다.

[음. 이 곳..제 7계로 떨어져 버린건가. 좌표를 분명히 제 5계로 설정했었는데 어떻게 된거지. 누가 게이트에 장난을 친거야. 으음. 감히 이 몸의 게이트에 장난을 칠 정도면.....그 녀석이 틀림없군. 돌아가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테다. 만약..무사히 돌아가면 말이지....아우..]

남자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혼자서 투덜대고있기는 하지만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 입가에는 웃음이 걸린 여유로운 표정이다. 남자가 떨어진 곳은 어느 숲 언저리이다. 숲은 밝은 연두색으로 치장하고 있다. 숲 바깥 언저리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향긋한 꽃내음으로 마음을 절로 편안하게 만든다.

[흐음. 좋은 향기야. 바람도 부드럽고. 이 곳은 벌써 봄이로군. 좀 더 가벼운 옷차림이 좋겠어. 아핫. 슬슬 마을을 찾아 가볼까.]

그는 겉옷을 벗어들고 속에 겹쳐있업던 하얀색 티셔츠만 입은 채로 걷기 시작한다.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니 가느다란 연기가 여러 가닥 솟아 오른다. 아마도 마을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리라. 남자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따스히 비추는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향긋한 꽃내음,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며 노래하는 새들과 너무나도 우아하게 춤사위를 펼치는 나비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낸다. 햇살은 남자의 검은 머리칼 위를 미끄러져 내리다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순간, 허공에서 산산히 흩어진다. 남자의 입가에 머금은 웃음과 흥얼거리는 노래가락이 어우러져 대기로 퍼진다. 싱싱함을 잔뜩 머금은 푸른 풀잎들이 남자의 바지자락에 스치우며 또다른 노래가락을 만들어낸다. 남자가 자신들과 한몸이기라도 한 듯, 그렇게 자연 속에 녹아들어가고 있다.

[여러분, 좋은 시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인간들 속으로 가야하니까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군요. 자.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그 모습 잃지 않기를.]

남자의 작별 인사가 끝나자 바람이 다시 불어와 그의 주위를 한바퀴 쓰윽 돌고는 푸른 평원 속으로 달려가버린다. 남자는 눈을 들어 그 뒤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이윽고 성문 안으로 사라진다.

.
.
.

[이 곳은 경치가 좋군. 역시 7계는 편안히 살아가기 좋은 곳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따분하지.]

마을 안의 강가를 걸으며 남자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한다. 햇살이 잘게 부서져 반짝이는 강물을 보는 그의 눈이 반짝인다. 이윽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음률을 타고 흐르는 그의 노래는 가사와 내용을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듣기 좋은 울림을 싣고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강가에 앉아 낚시를 하는 한 노인에게 다가간다. 노인을 보는 그의 눈빛이 참으로 따스하다.

[어르신. 물고기는 잘 잡히나요?]

물고기를 낚는 노인의 곁에 걸터앉으며 물고기를 담는 바구니를 슬쩍 곁눈질한다. 바구니에는 손바닥 정도 크기의 물고기가 대여섯마리 꼬리를 퍼덕이고 있다.

[그저 식구들 입에 풀칠하는 정도는 잡힌다오.]

나그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여전히 강만을 바라보며 노인이 말한다. 그런 노인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그네가 말한다.

[식구가 그리 많지 않으신가 보군요.]
[나와 손녀딸 둘 뿐이라오.]
[아..그러시군요..낚시하시는데 시끄럽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그렇지도 않소. 이 정도면 오늘 먹을 거리는 될터이니. 적적한 노인네 말상대나 해주오...앗?]

주름이 가득 잡힌 눈가에 웃음을 띄며 나그네에게 눈길을 주던 노인의 얼굴에 갑자기 놀라움이 떠오른다. 이윽고 그 눈빛은 아련한 그리움을 담은 듯한 눈빛으로 바뀐다.

[아아...다..당신은..내가 아는 어떤 분과 참으로 많이 닮았구려...설마 그 분이 맞는게요?]
[당신이 말하는 분이..아마 맞을 듯 하군요.]

나그네는 여전히 따스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그리움이 가득 차있던 노인의 두 눈에 이윽고 눈물이 어리기 시작한다. 떨리는 두 손으로 나그네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입에서는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흐..흐윽...라만님...흐윽...이제야 뵙게 되었군요...흐윽...크윽...라만님...]
[그레인...내 소중한 수호팔부중 중 하나..이제야 너를 찾았구나..]
[라만님...흑흑..용서하십시오...흐윽..곁으로 돌아가지 않고 멋대로 이곳에 남아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됨을 용서하십시오...흑흑..]

라만의 얼굴에도, 그레인의 주름진 얼굴에도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레인은 차마 라만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다리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라만은 조용히 눈물을 닦고 그레인을 일으키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내 충성스러운 팔부중 그레인이여. 어찌 이리 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아아..라만님..제 거처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지요...]

.
.
.

강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담한 오두막에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간혹 떨리는 목소리가 눈물과 함께 새어나오긴 하지만, 재회의 기쁨으로 두 사람의 눈은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 곁에서 16세쯤 되어보이는 소녀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자네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그 당시 그 누가 할 수 있었겠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나이를 먹을 줄이야. 사실 저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허허]
[대체 왜 이곳에서 살고 있는 건가? 그레인 자네에겐 충분히 돌아올만한 능력이 있었을텐데 말이야.]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기 마련이죠. 허허.]
[그런가? 하하. 간만에 자네와 술 한잔 하고 싶네. 내가 사지.]
[그러시겠습니까? 황공합니다. 라만님께서 술 사주시는 기회를 잡다니.얘, 하서야.]
[네, 할아버지~]
[미안하다만 할아버지의 오랜 친우가 오셨으니 심부름 하나 해주지 않겠니?]
[당연히 해드려야죠. 헤헷.]
[그렇다면 이 곳에서 가장 좋은 술을 사다주게나. 나머지는 내가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고.]
[네~ 다녀오겠습니다-]

소녀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뛰어나간다. 그런 소녀의 모습을 라만은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밝은 아이인 것 같군. 그래. 이름이 하서? 자네의 손녀라고?]
[...손녀라고 하지만..사실은 친손녀가 아닙니다...제가 우연히 맡게 되어 손녀딸로 키우는 것일뿐.]
[그래? 하지만 어딘가 자네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이곳 시간으로 15년 정도 같이 살았으니 닮아가는 거겠죠. 허허.]
[하하. 그럴 수도 있나. 어쩌다 저 아이를 맡게 되었는데?]
[그때 라만님 일행과 떨어져 9계로 갔었죠. 그 때의 기억은 정말 진저리가 쳐집니다. 덤벼드는 그 수많은 마물들을 어찌어찌 해치우며 몇년이나 9계를 헤매다가 간신히 4계로 도망을 쳤지요. 정말이지 평생동안 그렇게 힘든 전투는 처음이었습니다. 4계에서 장로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기운을 차렸으나, 다른 계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서둘러 돌아가다가 라만님께 사죄하는 마음에서 잠시 7계에 들러 인간들의 음식을 사가려하는데 어느 인간 여자를 구해주게 되었지요.]
[그래? 그럼 그 여인과 사랑에 빠졌겠군 그래.]
[...라만님..]
[아..아하핫. 노..농담이야. 그런 눈빛으로 보진 말아주게.]
[계속하겠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가는 길에 습격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7계는 마물들이 없지만 가끔 산짐승들이 나타나곤 하지요. 여인의 일행을 늑대가 습격한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구해주었지요. 여인을 가까운 마을로 급히 옮겼으나 숨졌습니다. 여자아이 하나를 남기고 말이죠.]
[아. 아까 그 여자아이인가?]
[...라만니임...제 얼굴을 보시지요. 이게 그 나이에서 스무살 더 먹은 얼굴입니까?]
[...미안하네. 계속해보게.]
[하여튼 그 아이를 맡아달라는 여인의 부탁을 받은 저는 결국 7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실은 그 아이가 제 앞가림만 하게 되면 라만님 곁으로 떠나갈 작정이었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었죠. 전 그리 매정한 놈은 못되니...그래서 계속 그 아이의 애비 노릇을 해 온 것입니다. 다행히도 건실한 청년과 결혼하여 몇년 동안 꽤나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았죠. 그 모습을 보니 정말 뿌듯하더이다. 이게 딸자식 가진 애비의 마음이구나 싶더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간신히 아이를 하나 낳고는 제 에미 곁으로 가버렸어요. 사위 놈도 아이가 태어난 다음해에 제 안사람을 따라가버리더군요. 참으로 별의별 고생을 해가며 아이를 키운거랍니다. 이제 저 아이가 제 앞가림을 할 때가 되면 떠나려 했으나 이미 나이를 먹은 후라 라만님 곁으로 가는 것이 망설여졌지요...라만님 허락도 없이 이리 오래 떠나 있어 정말 죄송하옵니다. 이 얼마나 큰 죄인지...게다가 제 7계에서 보내는 시간은 유난히도 빨리 흘러가더군요.]
[그레인..고생했네...저 아이가 다 자라면 언제든 돌아오게. 자네 나이가 무슨 상관있겠나. 다만 그렇게 씩씩하던 자네가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니 그저 조금 마음이 아플 뿐이네.]
[제가 그곳에 돌아가면 다른 자들은 모두 예전 그대로인데 저만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 부끄러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은 걱정말게. 어차피 내 곁으로 돌아오면 모두 해결되는 것 뿐이야. 지금 내곁의 팔부중은 일곱 뿐이라네. 자네 자리는 언제까지고 비워두겠어.]
[고맙습니다. 라만님. 언제고 꼭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레인..기다리지. 얼른 돌아오게나.]

잠시 짧은 침묵이 두 사람의 주위를 감싸돈다. 세월의 차이는 너무도 무심하여 둘의 모습이 확연히 대비된다. 여전히 건장한 라만과 세월의 풍파에 깎여버린 그레인.
둘 사이의 시간은 너무나 많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잠시 후, 끼익하는 문소리에 침묵이 깨진다.

[할아버지, 다녀왔어요.]
[오오 그래. 고생많았다. 얼른 들어오거라.]
[네.]
[손님께 인사드려야지. 이 분은 라만님이시다. 할아버지가 예전에 신세를 졌던 분이시란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하서입니다. 만나뵈서 반가워요.]
[하서양, 만나서 반가워요. 내 이름은 라만. 할아버지와 예전에 친했다오.]
[네. 두분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이만 올라가볼께요.]
[아아. 고맙네.]
[하서야, 고맙다.]

나무로 만든 계단이 소녀의 발길을 따라 삐걱이며 노래를 부른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라만이 입을 연다.

[자 이제 술을 따르도록 하지. 오. 홍주로군. 간만에 맛보는 7계의 술이야. 향긋하게 입안을 감도는 여운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숙취가 없어서 좋지.]
[라만님은 이 술 꽤 즐기셨죠.]
[그렇지. 무엇보다도 색이 곱지 않은가. 눈으로도 취하고 향으로도 취하고 맛으로도 취하니 이런 명주가 또 어디 있을까.]
[허허. 여전하십니다. 자, 받으시지요.]
[그래그래. 그레인 자네도.]

두 사내는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한다. 저녁 어스름께던 시간은 어느 새 창으로 달빛이 흘러들어오는 시간이다. 탁자에 앉은 두 사내는 은빛으로 물들어간다.

[그래..그레인. 그런데 왜 여지껏 혼자인가. 이 곳의 여인과 결혼을 할 수도 있었지 않은가.]
[...라만님...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당치도 않은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찌 결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으음..그래그래..그랬던 거로구만. 자네 이 긴 세월동안...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건가.]
[네...그렇습니다...]

짐짓 부끄러운 듯 슬몃 웃음을 흘리며 그레인이 말을 잇는다.

[어찌 제가 헐을 두고 다른 사람을 반려로 맞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하는 헐을 두고...언젠가는 꼭 돌아가겠다고 맹세했는데..어떻게 제가 이 곳에서 다른 사람과 살 수 있었을까요. 헐을 두고...제 목숨보다 소중한 헐을 두고요...]
[그렇구만...자네 마음 알면서 그런 질문으로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하네..]
[헐은 제 희망입니다. 언젠가 돌아가기 위해서 절대 놓지 못할 희망입니다. 행여나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하여도 언젠가 영혼만이라도 그 곁으로 돌아가기 위한 희망입니다. 라만님은 제 목숨을 바칠 소중한 주군이십니다만 송구스럽게도 헐은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제가 충성을 바칠 존재는 라만님이시지만 헐은...제 영혼을...제 존재를...제 사랑을 모두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언젠가 이 세상이 끝난다면, 이 세상이 끝날때까지, 아니, 세상이 끝난 후에도 영원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제 몸과 영혼이 산산히 부수어져 흔적조차 없어진다해도 차마 잊지 못하는, 아니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헐입니다, 라만님.]
[...나는..아직 사랑을 하지 못해 자네의 그 마음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레인이 헐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알 수 있어..]
[라만님 죄송합니다. 주군께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아냐아냐. 늘 헐과 그레인은 보기 좋았는걸. 늘 둘을 보면 즐거웠어.]
[허허..고맙습니다. 라만님. 라만님 곁에서 늘 헐과 함께하던 그 때가 참으로 그립군요...]

과거의 회상에 잠겨있던 그레인의 눈이 갑자기 반짝인다. 그 눈에는 아까와는 다른 놀라움과 그리움, 사랑과 회한이 담겨 있다.

[이..이 기운은. 헐! 여기 있는거야? 라만님과 같이 온 거야? 헐! 여기 있다면 내 앞에 나타나줘! 제발! 제발..헐....]
[...그레인...진정하게나..]
[라만님. 제가 어찌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어째서 여태 느끼지 못한 걸까요. 이토록 친숙한 기운을, 내 영혼의 반려의 기를 말입니다. 이 늙어버린 육체는 이토록이나 둔해져버린걸까요. 아아. 라만님. 대답해 주십시오. 이 기운은 헐의 기가 아닙니까. 아아. 헐...]
[헐. 이제 그만 나오지 그래.]
[헐...헐...제발...내 앞에 나타나줘...제발...]
[[그레인....]]

라만의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반지에서 잠시 반짝이다가 이내 마룻바닥으로 내려온 빛은 아래에서 위로 점차 커지며 사람의 형체를 이루어간다. 사람의 형체를 이룬 빛은 점차 밝음을 잃어가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새 흑청색 머리카락과 까무잡잡한 피부에 무장을 갖춘 한 사람이 탁자 옆에 서 있다.

[헐! 헐! 아아. 내 유일한 사랑. 헐...이제야 만나게 되다니...아아...]
[그레인....그레인........]

그레인은 거의 튕겨지듯이 의자에서 일어나 헐을 부둥켜 안는다. 그의 머리를 가슴에 소중히 껴안으며 헐은 눈을 감는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그 둘은 그렇게 서 있다. 그 둘을 지켜보는 라만의 눈가에는 옅은 웃음이 어려있다. 무척이나 소중한 듯이 바라보는 눈빛이다. 라만은 나직히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본다. 달은 이제 하늘 높이 떠올라 중천에 자리잡고 있다. 이제 곧 두번째 달이 떠오를 시간이다. 라만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새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또 하나의 달이 창 밖에 모습을 나타낸다. 7계의 밤을 밝히는 두 개의 달. 언제봐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두 달의 빛을 받은 헐과 그레인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레인의 얼굴을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이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가며 눈물을 흘리는 헐과 지그시 눈을 감고 헐의 품에 안겨 있는 그레인의 모습은 너무나도 성스러워 차마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라만은 마치 딴청이라도 피우는 듯 이제 막 떠오른 두번째 달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레인과 헐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레인...]
[헐...]
[널 기다리느라 힘들었어...지치진 않았지만...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지만..네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힘들었어....네가 살아서 어딘가에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었지만..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힘들었어...그레인..이제야 만나다니...그레인...그레인...]
[미안해..헐...나 역시 네가 너무나 그리웠지만 차마 앞을 못보는 딸을 두고, 어린 하서를 두고 갈 수는 없었어...헐....미안해....미안해....]
[바보 자식. 이대로 널 끌고 갈까 보다. 네가 다시 돌아올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너를 이대로 데리고 가버리고 싶다.]
[아직 어린 하서를 두고 그럴 수는 없어..조금만 이해해줘..응? 헐...]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것이 너의 장점이자 단점이지..그렇지...그냥 저 아이를 죽여버리고 너를 끌고 가면 되겠군.]
[...헐....]
[상당히 긴장하시는데 그래. 바보 그레인. 걱정 마. 죽이지 않아. 네가 슬퍼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아. 네 슬픔은 바로 내 슬픔이니...절대로 그런 일 하지 않아..하지만...더 이상 기다리라는 것은 너무해. 네가 이렇게 무사하다는 것을 아니까 좀 더 기쁜 맘으로 기다릴 수는 있겠지만, 더 이상 너를 두고 나 혼자 살 수는 없어...]
[미안해..헐...곧 돌아갈께...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건 금방이니까...더 이상 네가 힘들지 않도록...금방 돌아갈께...이렇게 늙어버린 나를 받아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나를 받아준다면, 네 곁으로, 라만님의 곁으로 돌아갈께...헐...]
[그레인...기다릴께...네가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릴께...걱정마. 널 잊지 않아. 네 늙은 모습따위 신경쓰지 않아. 네가 이런 모습이 되었다고 해서 네가 네 자신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 나 역시 나이를 먹으면 늙어. 네가 나보다 조금 더 빨리 도착했을 뿐이야. 그러니 그 모습으로 나를 기다려줘. 내가 네게 갈테니. 걱정마, 그레인. 너를 탓하지 않아. 너를 탓한다는 것은 내가 널 기다려왔던 그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니까. 난. 널 원망하지 않아.]
[헐...되도록 빨리...너에게 돌아갈께...헐...]
[그레인..사랑해...사랑해...]
[사랑해..헐...사랑해..헐...]
[짝.짝.]

갑자기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와 순식간에 헐과 그레인을 둘러싼 분위기를 흩날려 버린다. 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라만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다.

[이봐이봐. 아직도 그러고 있냐. 잠시 눈 감아주려고 했는데 너무하잖아. 내 생각도 좀 해주지.]
[아. 라만님.]
[라만님.]

목덜미까지 시뻘개진 모습으로 헐과 그레인은 라만을 쳐다보고 황급히 의자에 앉는다. 그런 둘의 모습을 라만은 짖궂은 웃음을 띄고 바라본다.

[이거 너무한데 그래. 헐을 이번에 호위로 데려온 건 나인데 말야.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만난 그레인과 한참 술을 마시는 중이었는데 호위를 서던 헐이 멋대로 기나 흐트러뜨리고 말야. 정말 너무하는군. 아. 달빛은 밝은데 나는 왜 이리 가슴만 시려오는 걸까. 저 둘의 애정은 저 하늘의 두 개의 달빛보다 강렬하고 술 향기보다 진하구나. 그래. 나는 사랑 한번 못 해보았으니 저 둘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오. 게이트 잘못 열어서 엉뚱한 곳에 떨어진 내 잘못이지. 아아. 라만. 그 동안 살아온 세월이 참으로 무의미하구나. 어찌 살았길래 주군을 내버려두고 둘만의 해후를 즐기는 부하들 앞에서 이리 고독을 씹고 있느냐. 아아. 시간아, 말해보아라. 내가 어찌 너를 흘려보냈는지. 참으로 통탄하구나.]
[라만님...죄송합니다...만....너무 오버하시는거 아닌가요.]
[헐..무슨..그런....말을...]
[맞잖아. 그레인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음..그거야 뭐..맞는 말이긴 하지만..]
[....너희들...주군한테....뭐..라..고...?]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하던 라만이 와락 헐과 그레인을 껴안는다. 갑작스러운 라만의 행동에 놀란 그들은 라만의 품 속에서 잠시 허우적 거리다가 겨우 상황을 알아차리고 킥킥대며 실소를 흘린다.

[자아자아. 다들 오랜만에 만났으니 회포를 풀어보자고. 술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마시자. 이 바보 커플들!]
[아니, 라만님 왜 저희가 바보커플이죠?]
[그레인 말이 맞아요. 그레인 혼자 바보지 저는 아닙니다!]
[내 말이 곧 법이다! 헐, 네가 아무리 너는 바보가 아니라고 해봤자 너는 그레인이랑 커플이니까 너도 바보인거야. 유유상종이라는 말 모르나?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 몰라? 너도 그레인이랑 똑같아! 그리고 그레인, 너 몰랐냐? 너희가 바보커플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바보인거야. 크핫핫!]
[으아. 라만님!]
[너무하십니다, 라만님!]
[으하하. 너희가 아무리 바보커플이라는 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려해봤자 소용없어! 이 라만님의 말씀이 곧 법이니라! 핫핫핫! 자, 마시자~!]
[각오하시지요, 라만님. 이 헐이 술만큼은 라만님께 뒤지지 않음을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 그레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둘을 한번 상대해보시지요!]
[그래, 좋다!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자, 마시자! 핫핫핫!]
[하하하핫]
[허허허허]

세 사람은 너무나도 기쁨과 행복에 겨운 얼굴로 술잔을 기울인다. 어느 새 중천까지 떠오른 두번째 달의 빛이 창문너머에서 탁자를 비추고 있다.

.
.
.

하서의 잠든 얼굴을 옆에서 헐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하서를 바라보는 헐의 눈빛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듯 매우 복잡한 빛을 띄고 있다.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은 헐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레인...]
[응?]
[내가 이런 곳에서 네 손녀딸이 잠든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그랬겠지...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팔부중 그레인이, 팔부중의 하나인 내가 이런 곳에서 물고기나 낚는 어부가 되어 손녀를 키우며 살게될 줄은 몰랐어. 그것도 내 곁에 네가 없이. 그 때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야.]
[나 역시 그래. 그 때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하더라도 내가 하던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내 곁에 네가, 네 곁에 내가 있는 광경 뿐이었는데...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마치..꿈과 같아. 그 세월을 뛰어넘어 이렇게 너와 내가 이곳에서 만났다는 것이..]
[라만님께 감사드려야지. 그 분이 이상하게도 이번 호위로 나를 고집하시더구나. 대개 이계로 떠나실때는 하슬라를 데리고 다니시는데 말이지. 아마도 이런 일을 조금은 예견하고 계셨나봐. 비록 말로는 워프 게이트를 누가 손댔다고 하시지만 사실은 네가 있는 곳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계셨기 때문에 일부러 이 곳에 떨어지도록 미리 나 몰래 손을 써 놓으신 것 같아. 아마 라흐쉬나님과 짜고 그러셨겠지. 나..그래도...라만님께 정말 고마워. 라만님 같으신 분이 일일이 우리 모두에게 신경써주셔서 이렇게 너를 만날 수 있었으니 말야. 나 팔부중의 일원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라만님 직속 무관인 팔부중이 된 것이.]
[.......]
[그레인....잠든 거야? 벌써 잠들었어?]
[...]
[..그럼 이제 나도 잘께...]

헐은 눈을 감는다. 그레인은 헐을 등진채 누워있기 때문에 그의 주름진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헐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레인이 흘리는 눈물은 그의 주름살을 따라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이윽고 헐의 숨소리가 낮고 고르게 되자 그레인은 눈물을 훔치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치 헐이 금방이라도 깨지기 쉬운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헐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감고 있는 두 눈에 입을 맞추고, 따스한 숨을 내쉬는 코에 입을 맞추고, 살며시 다문 입술에 입을 맞춘다.

[헐..잘자...]
[...]

그레인이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자 헐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살며시 달싹이는 헐의 입술은 [그레인..사랑해..]라고 말하는 듯 하다.

.
.
.

밝게 타오르는 태양에 쫓기듯이 두 개의 달은 서둘러 지평선 너머 저 먼 곳에 있는 자신들의 월궁으로 사라진다. 푸른 하늘에 혼자 남은 태양은 마치 자신의 밝음을 뽐내기라도 하듯 마음껏 황금빛과도 같은 햇살을 뿌려댄다. 해가 뿌리는 금가루에 몸이 닿은 생물들은 마치 긴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라도 하는 듯 한껏 몸을 편다. 조용한
밤이 가고 세상 모두가 깨어나 바쁘게 돌아가는 낮이 돌아오고 있다.

[일어나세요! 하서가 끓인 해장국 드시라구요!]

하서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술병을 챙기는 한편, 간밤에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댄 주객을 깨운다. 하서의 얼굴에는 왠지 신나는 듯한 표정이 어려있다.

[으...조금만 더 자게 해줘....우우웅...]
[안돼욧! 일어나시라구요, 라만 아저씨!]
[으으..나..난...아저씨가 아니라구....으으...]
[에잇. 당장 일어나요!]

아래층의 소란에 잠을 깬 듯 부스스한 모습의 헐과 그레인이 삐걱대는 계단을 내려온다. 그들은 그나마 라만보다 술을 덜 마신 듯 조금은 나아보이는 모습이다.

[바깥의 우물가에서 씻도록 하자.]
[그레인..라만님 데리고 가자. 팔 잡아. 내가 다리 잡을께. 하서야. 밖에 나가서 물 좀 길어 놓을래?]
[아, 네.]
[자, 하나, 둘, 영차. 자, 그레인 얼른 나가자!]
[으아. 너희 둘 지금 뭐하는 거야!]
[하서야! 물뿌려!]

촤아악!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있는 우물물이 라만과 그를 들고 있던 헐, 그레인 모두에게 쏟아진다. 헐과 그레인은 라만의 젖은 모습을 보고 배를 움켜쥐고 웃어댄다. 곧 라만도 그들을 따라 신나게 웃기 시작한다. 하서는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 국자, 수저와 그릇을 내오고, 낑낑대며 솥을 들고 온다.

[그럼 아침은 여기서 먹도록 해요~!]

.
.
.

마을 어귀 성문 밖. 라만과 헐, 그레인은 서로 아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부드러운 봄바람이 그들 주위를 나긋나긋한 몸짓으로 휘감아 돈다.
따스히 내리쬐는 햇살도, 풀잎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푸른 평원도 어제와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이다.

[가시는 겁니까?]
[그래..만나자마자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긴 하지만 돌아가야지. 원래 7계는 내가 오려한 곳도 아니었으니. 다시 돌아가서 원래 목적지인 5계로 가야지.]
[라만님...그레인을 만난지 겨우 하루인데...]
[헐..]
[음...그럼 헐은 여기다가 떼놓고 갈까? 어때 그레인?]
[라만님!]
[...그냥 헐과 함께 떠나십시오...]
[그레인..? 너..나와 함께 있고 싶은 것 아니었나?]
[난 내 말에 네가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나보군.]
[...제 곁에 헐이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 당장 헐이 있어야 할 곳은 제 곁이 아니라 라만님의 수호팔부중입니다. 그것이 헐의 역할이지요. 제 역할은 하서를 돌보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 역할이 끝나면 저는 돌아갈테니 걱정마십시오.]
[그레인...정말이지...너같은 바보는 정말...내가 어쩌다 저런 바보와...]
[헐. 진정해라. 그레인도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으니 그러는 거겠지. 조금만 이해해주자.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테니.]
[라만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돌아가겠습니다. 헐. 하서가 성인이 되는 그 날, 하서의 18세 생일이 지나면 곧 돌아갈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더이상 네게 날 기다리는 일 따위 시키지 않겠어. 약속할께.]
[....]
[어이, 헐. 그레인이 저렇게 말하는데.]

헐은 입을 꾹 다물고 그레인을 바라보며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레인은 그제야 굳은 얼굴을 펴고 웃음을 짓는다. 온통 주름이 져 있는 얼굴이 너무나도 환해 보인다. 헐은 묵묵히 라만의 뒤편으로 선다.

[그래. 이제 작별이구나. 조만간 다시 만날때까지 건강하게, 그레인.]
[네, 라만님. 안녕히 가십시오. 헐, 잘가. 사랑해.]
[...]

헐은 그저 조용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작별을 표한다. 그리고는 뒤돌아 라만의 뒤를 따라 걷는다. 헐과 라만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레인은 성문 밖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완전히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마을로 들어간다.

.
.
.

라만은 처음 이 곳에 도착한 장소를 향해 걷고 있다. 그 뒤를 헐이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발치만 보며 따라 걷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라만이 입을 연다.

[헐. 아까부터 한마디 말도 안하는구나.]
[....]
[...말하기 싫으면..그만 두게나..]
[..라만님....흐...흐흑...]
[...그래..헐..]
[흐윽...사..사실은...입을 열면..흐윽...울어버릴 것 같아서...크흑..그런데..큭..차..차마...그레인..앞에서..울..수..없어서...흑...그레인과 헤..어지는데..우..는..모습..흑...보일..끅...수..없어서...끅끅..그..래..서...]

목이 메는지 헐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헐의 모습을 바라보며 라만은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이며 말한다.

[자, 헐. 실컷 울게나. 여기서는 그레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염려말고 실컷 울어. 자네 마음 알고 있어. 그러니 실컷 울라구.]
[흑..라만..님...흐...으어어엉]

헐은 그렇게 라만의 어깨에 기댄 채로 한참을 더 큰소리로 울어 댄다. 라만도 가슴아픈 표정으로 헐을 토닥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실컷 울었는지 헐이 라만의 어깨에서 고개를 거둔다. 땅을 바라보고 있지만 목덜미가 붉어진 것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자기가 한 일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헐이 말한다.

[흠..라만님..고맙습니다..이제..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그나저나 그레인 바보녀석. 제 친딸도 아니고 친손녀도 아닌 아이들을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다니. 간밤에 그냥 바라보지만 말고 그 아이 죽여버릴 걸 그랬나 봅니다. 감히 이 헐님에게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레인을 빼앗다니.]
[헐..여전하구나. 네 성격은. 큭. 그래도 그레인의 그런 점이 참 맘에 들지 않나. 그렇게 정많고 착한 마음이. 그게 바로 그레인의 매력이지.]
[...그렇군요. 그레인이 절 구해주지 않았다면, 전 팔부중도 아니었을테고, 그레인을 사랑할 수도 없었으니....]
[그래..그렇지...]
[음.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레인은 바보라니까요!]
[그만좀 투덜대시지 그래. 그렇게 열렬한 사랑고백까지 받았으면서 뭘 더 바라는 거야? 그거 듣느라 기까지 흐트러뜨려서 그레인한테 들킨 주제에. 돌아가면 각오해. 그런 실수따위 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훈련시킬테니.]
[너무하십니다, 라만님! 라만님은 그런 거 들어보지도 못 하신 분이면서!]
[뭐야아? 그래 좋겠다. 이 세상이 끝나도 사랑해줄 사람이 있는 헐은. 어이구. 다른 사람 앞에 두고도 그렇게 잘도 낯뜨거운 소리나 해대고. 좋겠네. 그래. 차라리 그때 닭이 되어 날아가버릴걸 그랬어. 그랬으면 이렇게 헐 녀석이 질질 짜대면서 투덜대는 꼴도 보지 않았을 테고, 내 맘대로 편안히 여행할 수 있었을텐데. 내가 잘못했지. 내가. 내가 잘못한거야. 뭐하러 헐을 데려왔을까. 하슬라를 데려왔으면 이런 꼴 안 봤을텐데. 다 내 잘못이야. 업이지, 업.]
[...라만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이제 가자. 게이트에 들어갈 준비해.]
[네. 그러지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뭐?]
[.....여기에 그레인이 있다는 거 라만님이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저를 호위로 데리고 오신데다가 워프 게이트 잘못 만든 척 해서 이리로 오신 거죠?]
[응? 질문이 어째 한가지가 아닌 것 같은데?]
[대답해주세요, 라만님!]

딴청을 부리며 귀에 손을 갖다대는 라만에게 헐이 소리치자 라만은 만면에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위프 게이트로 뛰어들며 소리친다.

[그건 비밀이지! 알아서 잘 생각해보라구, 헐!]

'내가 만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4년전 꿈  (0) 2004.07.29
[] 어느 밤에  (0) 2004.06.10
[徽娟] 序 - 시작.  (0) 2004.06.10
[] 金斧  (0) 2004.03.07
[] 배신자들  (0) 2003.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