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6. 10. 07:38

[] 어느 밤에

- 푸드득
검디 검은 하늘로 하늘만큼 검은 까마귀가 날아오른다.
헐은 잠시 고개를 들어 숲속을 바라본다.
사방에 놓인 결계석 내에 피워진 모닥불.
지글지글 잘 익은 멧돼지 고기.
흥겨워보이는 동료들.
그렇지만...
차마 선뜻 끼어들기는 힘든 분위기.
역시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헐은 되도록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기척을 죽이며
다시 결계석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레 짐을 챙겨들고 결계석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까맣다.
별도 하나 보이지 않는 유난스레 검은 하늘.
이런 밤에는 그 지긋지긋한 마물조차 숨죽이고 나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왜일까.
유독 이렇게 까만 밤만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떠들썩한 소리가 멀어지는 방향으로 무작정 걷는다.
라만의 성으로 가는 길도 아니다.
그저.
마물조차도 나오지 않는 고즈넉한 산길을
무작정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갑자기 눈 앞이 확 트이며
또다른 검은 하늘이 나타났다.
별빛도, 달빛도 없는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호수.
너무나 맑아서 너무나 검은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호수였다.
헐은 그대로 걸어가 호수에 발을 담갔다.
아찔할 정도로 차가운 물.
역시나 아직은 물 속에 들어가기엔 추운 계절이다.
잠시 그렇게 물 속에 있던 헐은 물 밖으로 나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로 호숫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면 여전히 검디검은 호수가 보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리면 더욱더 검은 하늘이 보였다.

생각조차 하기싫은 지난 일들.
검은 하늘은.
어둠은.
그 모든 것을 덮어준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도록.
떠오르지 않도록.

- 바스락.
얼마나 그렇게 하늘을 보며 누워있었을까.
수풀을 헤치며 뭔가가 호수 쪽으로 다가왔다.
헐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누워있다가
허리춤의 칼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아. 아름다운 호수로군."

수풀에서 걸어나온 검은 그림자는 잠시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는 헐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역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려 빠져나간것이었구나."

헐은 칼을 잡은 손에서 힘을 살며시 빼며 물었다.

"누구지. 그레인인가."

"알아주니 고맙군."

"왜 따라온거지. 남의 뒤를 밟는 고약한 취미라도 있는건가."

"단지..네가 그렇게 살며시 빠져 나가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을 뿐이야."

그레인은 헐의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멋진 곳이군. 나로써는..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를 정도야."

"그저. 걷다보니 나왔을 뿐이야. 굳이 오려 한 적 없어."

"호오. 그런데도 이런 곳을 찾았다니. 역시 본능인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할말 없다면 돌아가서 그 흥겨운 자리에나 끼지 그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나는 더 있다가 갈테니 너는 먼저 돌아가도록 해. 가는 길은 잘 알겠지."

"너..!"

"가라. 혼자 있고 싶어."

"너는...너는..너는! 대체 알고나 있는 거야?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어째서 너는 늘 제멋대로인거야! 모두들 너를 걱정하고 있는데!"

"나를? 흥. 그럴 이유 없잖나. 난 어차피 이방인. 너희와 어울리지도 못해."

"어차피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야. 그렇지만 서로 이 곳에 모였고, 그로 인해 동료가 되었다. 그런데 넌 어째서 늘 그러는 거야! 혼자만 상처입은 것처럼, 혼자서만 이 세상 모든 짐을 짊어진 것 처럼! 어째서 아무도 믿지 못하는 듯한 그런 상처입은 눈빛을 하고 있는거야! 왜..그런 눈빛으로 늘 우리를 바라보는 거야...왜...어째서..."

"그런 적 없어."

"그런 적 없다구? 흥. 웃기는 소리. 너는 늘 그런 눈빛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어. 제발 날 봐줘. 제발 날 봐줘. 제발 날 봐줘! 라고!"

"..."

"사실 넌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거잖아! 이제 제발 솔직해지란 말이야!"

"시끄러워."

"정말이지..너는...정말..너는..! 진짜 모르는거야? 진짜로? 내가..내가..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정말로 모르는 거야? 내가 왜 그 자리를 마다 하고 널 따라왔는지! 이렇게 한치 앞도 안보이는 밤에 왜 너를 따랐는지! 어째서 너의 곁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지! 정말로 모르는거냐구!"

"..그..그런 것..내가 알바 아니잖아!"

"훗..넌 언제나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 자신은 아무 잘못 없는 것처럼. 아무 책임도 없는 것처럼. 정말이지..남의 마음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야. 너는."

"난...난..."

"그래. 이제 알았다. 이만 떠나주지. 혼자서 그 경치 잘 감상하시라구. 다시는 우리와 함께하자고 말하지 않을테니,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테니. 혼자서 잘 즐겨. 이만 안녕."

그레인은 일어나서 그대로 걸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수풀 속으로 사라져 가는 뒷모습이 마치 어둠에 먹혀버린 것 같이 보였다.
헐의 입에선 아주 작은 한숨이 흘러내렸다.
그 한숨조차.
짙고 깊은 어둠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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